'하느님의 손'(뒷면) 하느님의 손 / 오귀스트 로댕
'하느님의 손'(앞면), 1896-1916년, 대리석, 95.5 x 75 x 56cm, 프랑스 파리 로댕 미술관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우리는 신체의 일부로서 그 쓰임에 너무나 익숙하여 하루의 시간에서 손의 중요성을 크게 깨닫지 못한다. 손의 존재와 그 움직임이 우리의 생명과 삶을 위해 필수적인 수단인데도 말이다. 손은 쓰임도 무수히 다양하다.
병자와 가난한 이들처럼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는 따스한 손이 있는가 하면, 악행을 서슴지 않는 잔인한 손도 있다. 그 수많은 쓰임의 손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손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손이 아니겠는가?
삶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종교적 신념과 상관없이 자의식에 빠져 차갑게 살아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종교에 귀의해서 절대자를 닮으려고 고행하는 삶도 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종교적 삶에 지쳐 일상으로 돌아왔으면서도 그 종교적 삶을 버리지 못한 채 그 고행의 세계를 형상화하고자 또 다른 고행의 길을 가는, 그런 삶의 모습도 있다. 바로 조각가 로댕(August Rodin, 1840-1917년)의 삶이 그러하다. 깊은 신앙심에서 방황하다가 종교적 아름다움을 형상화하는 데 평생을 바친, ‘신의 손을 가진 인간’이라 불리는 로댕의 말년 작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창조주의 손을 표현한 ‘하느님의 손’(La Main de Dieu)이다. 이는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었고 이 모든 것이 내 것이다.”(이사 66,2)라고 하신 주님의 손을 표현한 것이리라.
그 손은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는 창조사업을 하신 주님의 지고한 손이며, “강한 손과 뻗은 팔로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 136,12)라고 했던 사랑의 손이기도 하다. 조각가 로댕은 바로 이 손의 형상을 통해 하느님을 향한 아련한 그리움과 강한 믿음의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하며, 생명 창조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손에 쥐어진 돌 안쪽에는 엇갈린 자세로 서로를 부둥켜안은 두 남녀의 나체상이 있다. 남자는 얼굴을 여인의 젖가슴에 한껏 파묻은 채 여인의 머리를 당기고 있는데,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여인에게 맡기는 동시에 그녀의 모든 것을 틀어쥐려는 것 같다. 그런데 문란하게 보일 수 있는 이들의 행위가 어찌된 것인지 순수한 사랑의 이미지를 슬쩍 담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의 관능적 사랑이 하느님의 손 안에서 순진무구한 사랑으로 거듭나며, 하느님의 품에서 더없이 큰 행복으로 전이되고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사랑이라는 하느님께서 행하신 창조의 목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에 말이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1,26-27. 2,25).
이처럼 로댕은 인간이 누리는 사랑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하느님의 품안에 있는 사랑이라는 것, 아니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이 결여된 사랑이 얼마나 부질없는 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손의 뒤쪽을 보면, 남자의 오른쪽 정강이와 발가락이 하느님의 엄지 쪽으로 쏘옥 삐져나와 있다. 마치 어미의 자궁 속에서 탄생의 순간을 기다리는 태아의 발가락처럼 말이다. 이 나약한 모습, 연약한 생명이 새겨진 돌을 움켜쥔 하느님의 손은 더없이 강하고 우람하며 든든해 보인다. 마치 생명의 영원한 보호막인 어미의 자궁처럼. 로댕은 이와 같이 하느님의 품을 어떤 역경과 시련에 맞서서도 인간의 생명을 키우고 보호하며, 인간에게 깊은사랑을 베푸시는 견고하면서도 포근한 안식처로 찬미한다. “내가 왔을 때 왜 아무도 없었느냐? 내가 불렀을 때 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느냐? 내 손이 너무 짧아 구해 낼 수가 없다는 말이냐?”(이사 50,2)
이처럼 로댕은 신체의 일부로서 간과하기 십상인 손을 소재로 하여 하느님의 전능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 손이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위대하며 더없이 든든한 마음의 성으로 나타난다. 특히 하느님의 엄지에 기대어 보호를 받는 힘없는 발가락이 그렇듯, 우리의 나약한 생명과 꺼지기 쉬운 신앙의 불길이 영원히 하느님의 보호 아래에 있다는 것을 우리 마음 깊이 각인시키는 것이다.
조각가 로댕은 평소 하느님께서 행하신 창조와 생명을 재현해 드러내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는데,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느님을 떠올릴 때, 하느님께서 가장 먼저 생각하신 것이 그 모델이었을 것이다. 하느님이 조각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재미있지 않은가?”라는 그의 말 속에 그 의미가 담겨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사명감을 유감없이 드러낸 작품이 바로 ‘하느님의 손’이다. 이 작품은 로댕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가 사망하기 얼마 전에 그의 조수 폴 크뤼에가 마무리한 것이지만, 하느님의 더없는 사랑에 관한 로댕 자신의 인생관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그 단순한 이미지를 통해 영원불변한 진리의 세계를 보여주며, 인간에게 생명과 빛의 가능성 곧 견고한 신앙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로댕의 세계에 매료되어 그의 전기를 저술했던 시인 릴케는 로댕의 손이 지닌 작품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려놓은 손, 더 이상 자신의 출신지인 육체에 속하지 않고 독립된 처지에 있는 손, 손과 손이 만지거나 잡는 물체가 함께 모여 새로운 무엇, 이름도 없고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된다.”
이처럼 로댕은 이 작품을 통해 손이 일상의 손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의 손이라는 성경에 담긴 영성, 곧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크기와 깊이를 상징하는 지고한 손, 그리고 그 손 안에서 사랑을 느끼고 마음의 안식을 얻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학석사를,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예술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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