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 니콜라 롤랭의 성모상 / 얀 반 에이크 (1437년경, 나무 패널에 유채, 66 x 62cm,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sus)는 15세기 플랑드르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특히 그는 당시의 유화기법을 집대성하여 회화의 새로운 표현 곧 대상을 사실적이고 세밀하게 그릴 수 있는 길을 연 예술가로, 그의 ‘재상 니콜라 롤랭의 성모상’에서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15세기의 부르고뉴 공국을 유럽 강국으로 만든 유능한 재상이, 이 그림의 주인공인 니콜라 롤랭(Nicolas Rolin, 1376-1462년)이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한 의지와 능란한 수완 그리고 뛰어난 정치적 지략을 갖춘 고급 관료였다. 그는 재임하는 동안 자신의 군주인 ‘선량공’ 필립 공작(Ducke Philip the Good, 1419-1467년)을 유럽에서 최고 영예로운 지배자로 만들었으며, 부르고뉴의 영토를 여섯 배로 확장시켰다. 특히 ‘아라스의 조약’을 통해 교묘한 계략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겪은 백년전쟁을 종식시킨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당대 최고 권력자인 롤랭이 겸허한 자세로 성모자께 경배를 드리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깊은 신앙심과 죄의 용서라는 마음의 원을 드러낸다. 이 그림은 바로 정치인으로 그의 자부심과 더불어 정치인으로 저지를 수밖에 없는 악행에 대한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속에는 60대쯤 된 롤랭 재상이 기도대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아 성모자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성모의 무릎에서 아기 예수는 십자가가 달린 보관을 들고 한 손을 들어 재상을 축복한다. 성모 마리아의 머리 위에는 화사한 왕관을 든 천사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이 세속의 영광을 전혀 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당시 왕실의 전유물인 롤랭 재상의 담비털로 장식된 다마스커스산 문직(紋織) 코트는 성모 마리아의 붉은색 원피스보다 더욱 화려하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언덕 높은 곳에 자리한 롤랭의 근사한 대저택도 화려함과 권력의 힘을 맘껏 뽐내고 있다. 내부에는 대리석 타르시에가 깔렸고, 아치의 기둥은 포도나무와 종교적 주제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아케이트 밖으로 보이는 롤랭의 영지인 푸른 포도밭 초원과 큰 강, 그 강의 양편에 즐비하게 늘어선 아름답고 호사한 도시의 건물이 역시 현세의 부를 유감없이 과시하는 듯하다. 더욱이 그림의 헌납자로서 주인공은 관례상 성인에 비해 작고 낮은 위치에 있어야 함에도, 그는 그림의 왼편 절반을 차지한 채 성모자와 같은 크기의 동일한 높이에 존재하는 오만함을 보인다. 특히 X-레이로 촬영한 결과 그림 속의 롤랭은, 커다란 돈주머니를 찬 채 왕실 수입을 착복하기도 했으며, 아무 거리낌 없이 뇌물을 챙기기도 했던 그의 세속적 욕망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롤랭의 이런 절대권력 이면에는 항상 선의와 자선의 그림자가 존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선 아케이트 밖의 정원을 보면 백합과 아이리스, 중국산 작약이 자라고 희귀한 공작까지 노닌다. 종교적으로 백합은 순결을, 아이리스는 고통을, 가시 없는 장미인 작약은 원죄 없이 잉태한 성모를, 공작은 부활을 나타내는 그리스도교 도상으로서, 정신적으로나마 종교적 구원을 바라는 롤랭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특히 그는 자신의 사재로 본(Beaune) 지역에 환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하여 기증하였다. 이 자선단체는 오늘날도 롤랭이 기증한 포도원의 수입으로 운영된다. 반 에이크가 그림의 아치 기둥을 포도나무가 조각된 것으로 묘사했으며, 밖의 풍경을 푸른 포도밭으로 그린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림에서 롤랭의 무릎 방석에는 세밀화로 그려진 기도서가 놓여있다. 그 기도서 위로 희고 단정하게 모은 재상의 손은 기도를 하는 모습이다. 이 손은 경건하고 자비로운 신앙인의 손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모질기 한이 없는 잔인한 손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의 이 손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독실하고 겸손한 신앙인의 손으로 보인다. 세속적 욕망과 권력이 실제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를 암시하는 것 같다.
이 그림의 배경에 있는 다리 위에는 작은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이는 롤랭이 자신의 재임 기간에 행한 위대한 업적과 연관이 있다. 곧 그는 ‘아라스의 조약’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을 종식시키고, 프랑스에서 오래 전에 있었던 부르고뉴의 ‘무겁공(無怯公)’ 장 공작의 살해 사건에 대한 보상 약속을 받음으로써 국가의 실추된 위신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와 더불어 강 양편에 우뚝 솟은 많은 종탑을 가진 도시들은 실제 도시가 아니라 부르고뉴의 지배를 받던 많은 도시의 인상을 그린 것으로, 겐트와 브뤼즈, 제노바, 리옹, 오툉, 프라하, 리에주, 마스트리흐트 그리고 위트레흐트 등의 도시 모습이 혼합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광경이 북해 연안의 낮은 지대 곧 지금의 베네룩스의 평원에서부터 눈이 덮인 알프스에 이르는 사방으로 뻗치고 있다.
이 도시의 모습은 롤랭 재상의 지휘 아래 더욱 발전하고 부유해진 부르고뉴 시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이며, 동시에 이 도시가 종교적으로 숭고한 정신적인 장소 곧 하느님의 왕국이자 성모 마리아의 왕국인 ‘하느님의 도성(Civitas Dei)’, ‘거룩한 예루살렘’임을 암시한다. 정원 역시 롤랭 재상의 사치스런 소유물을 암시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 동정녀 성모 마리아의 ‘닫힌 정원(hortus conclusus)’을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원기둥 윗부분에 부조로 새겨진 성경의 이미지들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이런 의도가 바로 세속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한 인간의 염원이요 의지가 아닐까?
이런 은밀한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수수한 쿠션에 앉아 아기 예수의 왕좌 역할을 하는 성모 마리아는 ‘기도하는 죄인’에게 동정과 용서와 희망을 제공하는 모습이다. 마리아는 아주 아름답고 우아한 젊은 여인으로 묘사되는데, 얀 반 에이크는 그의 한 그림 액자에 “그녀는 태양보다도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그 어떤 별의 반짝임도 능가한다.”라고 적어놓았다. 이 문장은 솔로몬의 지혜서와 더불어 성모를 위한 기도문이 아닌가? 또한 성모와 재상의옷 테두리에는 금빛 글씨로 “레바논 삼목처럼 고귀한”이라는 문장을 수놓음으로써 성모 마리아의 영광과 하느님의 창조의 영광을 드높이고 있다.
이처럼 이 그림은 세속의 광영 속에서 한 정치인이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자비와 용서라는 종교적 열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의 마지막 순간 권력자가 돌아가고픈 지향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림을 보는 오늘의 우리에게, 비록 겉으로는 현실의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지만 그 정신과 마음의 진정한 안식이 무엇인지를 이 그림이 깊이 깨닫게 한다.
반 에이크 형제의 초상이라고 하는 그림 속 정원의 두 남자가 이 광경을 뒤로한 채 저 밖의 광경을 향한 것이, 그림 속에 자신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 한 인간적 욕망과 더불어 세속의 바람을 접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학석사를,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예술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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