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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오순절 / 에밀 놀데

by 파스칼바이런 2011. 11. 29.
오순절 / 에밀 놀데

 

오순절 / 에밀 놀데

(1909년. 캔버스에 유채, 독일 베를린 국립미술관)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오늘을 사는 우리는 너무도 많은 사건을 경험한 터라 웬만한 일에는 감동하지 않는다. 그만큼 마음에 세속의 먼지가 묻은 우리는 새롭고 경이로운 일에 놀라지도 감탄하지도 않는 무생물처럼 오늘의 시간에 무기력하게 편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일상의 타성에 젖은 우리와 달리, 자신의 삶에서 놀람과 환희 그리고 뜨거운 열정을 느끼고, 그런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화폭에 옮긴 예술가들이 있다. 바로 20세기 초엽 독일의 화가 에밀 놀데(Emile Nolde. 1867-1956년)가 그렇다.

 

그는 그의 마음속에 살아 꿈틀거리는 뜨거운 피, 강렬한 흥분과 감정을 이전의 온화하고 차분한 중간 톤의 색으로 표현하기에는 많은 한계를 느꼈다. 결국 그는 활화산 같은 자신의 감정을 순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생생하게 화폭에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작정하였다. 고상하면서도 장중한 색과 타협하지 않고, 온건하고 중후한 형태도 걷어치운 채, 자신의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거침없는 색감을 화폭에 붓질하였다. 여과되지 않은 원색과 일부러 왜곡시킨 기이한 형상을 통해 세상에서 느끼는 태양 같은 열정을 마음껏 표현하였다.

 

그는 자신이 엄격한 화풍에서 탈피하여 새롭고 자유로운 화풍의 문을 연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일군의 친구들과 함께 ‘다리파’라고 불렀다. 이른바 독일 표현주의의 효시가 된 것이다. 표현주의는 ‘비이성’과 ‘반전통’의 기치 아래 생생한 감정을 그대로 방출함으로써 우리의 정서를 자극하고 감동을 유발하는 예술이다. 한 인간의 순수하고 맑은 유아적 심성과 열정이 종교적 감수성과 마주치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그는 성경에 비친 많은 감동적 일화를 생동감 넘치는 색과 자유로운 형태로 고스란히 우리 마음에 새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예수님 부활 뒤 50일이 되는 날,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을 그린 ‘오순절’이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4).

 

마르코의 다락방에 모여 성령강림을 체험하는 순간, 사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감정은 주체할 수 없는 황홀감, 엑스터시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 아닌가? 놀데는 이 기적의 순간이 강렬한 색채와 매우 단순하고 일그러진 형체를 띠고 우리 마음속을 영원히 누비게 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불의 혀 모양을 한 성령이 모인 사람들 위에 내렸다. 이 불의 혀는 사람들 머리 위에서 활활 타오르는 것이, 마치 사람의 형상 위에 불을 붙인 모습이다. 마치 양초 위에 붙은 불과 같은 모습 말이다. 이런 형상은 이들이 자신의 몸을 태워 그리스도의 말씀을 밝힐 수 있다는 결연한 각오와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쁨과 열정에 들뜬 이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을 태워 ‘말씀’을 영롱하게 비추고 실현시킬 거룩한 몸, 속과 세를 초월한 몸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이 그림에서 보듯, 이런 놀람과 감탄, 환희와 열정, 거룩함과 희생이 함께한 열띤 감동의 도가니가 아니었을까?

 

거칠고 투박하게 그린 사도들의 얼굴은 성령의 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이,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각자 다른 언어를 말하는 무아의 황홀경에 빠진 모습이다. 얼굴의 황금색은 이와 반대되는 사도들의 옷색깔을 통해 더욱 강조되면서 이 순간의 황홀경, 그 초인적 경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들의 한가운데, 어린양으로서 희생과 하느님 사랑의 열정을 상징하는 붉은 머리카락과 생명과 믿음의 상징인 녹색 눈동자를 한 사람이 이 순간 가상으로 임재하신 그리스도 아닌가?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 만큼, 사도들의 커다란 눈들은 어린아이 같은 맑고 순수한 마음 곧 하느님 세계의 재현이며,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웃 사랑이라는 종교적 심성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불 모양의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내려주신 신비롭고 강력한 능력의 상징으로, 그에 힘입어 알지 못하였던 언어들을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향후 사도들이 수행해야 할 고행의 임무를 향한 불붙는 열정과 그들의 임무에 수반될 능력을 의미한다. 그 ‘말씀’의 이행은 세계 도처 인간들의 마음에 하느님의 ‘성전’을 짓는 것 아닌가?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미래의 성전 모습을 그리스도는 투박하고 커다란 두 손이 지어낸 형상으로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스승의 주문에 화답하고자 제자들은 혹여 사탄과 악이 끼어들세라 빈틈을 보이지 않고 촘촘히 앉아 서로 손을 굳게 잡고 믿음의 화합을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있다. 이런 하나가 된 결연한 의지와 믿음과 소망의 순간, 길고 험하나 하느님의 영광이 함께할 이 신비로운 여정과 아울러 ‘말씀’의 성전이 지어질 토대를 진한 황금빛 테이블이 대신하고 있다.

 

오순절을 주제로 한 기적의 황홀경을 나름의 독특한 형과 색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작품이 보는 이의 정신을 고양하고 감동을 주어 그들이 인생과 인간존재에 관한 고찰을 하게 되길 바란다.”는 놀데의 조형의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는 이런 ‘순박한’ 형성을 통해 자신의 이색적인 그림이 단순한 흥밋거리가 되기보다는, 무지 조하고 소박한 농부들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이기를 바란 것이다. 그는 일반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 마음의 기억에 존재하는 친숙한 이미지의 그림을 그리려고 먼 이국과 아련한 과거의 원시예술에 기댄다. 그는 실제 오세아니아의 원시문화를 비롯해 한국문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때묻지 않은 원초적 색과 형태를 자신의 작품에 적용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조형적 의도는 전통적인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유아적인 순수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원초적 순수함을 통해 종교적 심성을 해석했던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그가 그린 20여 점의 종교화는 기존 종교화의 인위적인 성스러움과는 거리를 둔 채, 어린이가 새로운 인형을 손에 쥐었을 때처럼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감탄과 감사, 그리고 경탄과 환희의 이미지를 통해 하나의 사건을 구현한 것이다. 그렇게 삶은 아름답고 신선하며, ‘말씀’은 그 삶의 모습을 신비로운 감정과 기쁨에 들뜨게 한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학석사를,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예술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