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문 / 로렌초 기베르티 (1425~52년, 브론즈, 피렌체 대성당의 성 요한 세례당)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1401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상인조합은 도시 중앙에 자리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딸린 성 요한 세례당의 두 번째 청동대문 제작의 경쟁 입찰을 공고하였다. 이 성당은 1150년경에 완성되었으며, 그 첫 번째 청동대문은 1330년에 안드레아 피사노가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의 작업은 흑사병 때문에 중단되었다가 1401년에 조합이 재개한 것이다. 조합은 두 번째 문(북쪽 문)을 제작할 예술가를 엄정하게 심사한 뒤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년)에게 이 성스런 작업을 의뢰하였다. 기베르티는 ‘그리스도 전기’를 주제로 28면의 청동문을 21년에 걸쳐 제작하여 1424년에 완성하였다.
두 번째 문을 제작 중이던 기베르티는 곧 세 번째 문(동쪽 문)을 다시 위임받게 되었다. 그리고 27년간 새기고 파낸 끝에 1452년 ‘구약 이야기’를 주제로 10면의 정교한 양각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기베르티가 이 문을 제작한 뒤 먼 훗날 이 황금빛 문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감명을 받은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감탄한데서 이 문의 이름이 생겼다.
이 문에는 천국이 실제 나타나 있지 않다. 오히려 미켈란젤로가 심안(心眼)으로 보았듯이, 구약의 여러 이야기를 동시에 보여주는 이 청동문은 하느님의 말씀 가운데 천국이 이미 존재함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이 문은 가로 둘, 세로 다섯의 모두 열 구획으로 나누고, 각각 열 가지 주제의 성경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똑같은 인물이 한 장면에 중첩되어 등장하는 동시적 구도를 취하고 있다.
위 왼편 첫 칸의 주제는 ‘아담의 창조’이다. 동판의 왼쪽 아래에 아담의 창조 장면이, 중앙에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의 창조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왼쪽 위에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있으며, 그 옆으로는 천사들에 의해 낙원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보인다. 바로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낙원에서 추방당하는 메시지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첫 주제의 오른쪽에 나타난 두 번째 주제는 ‘카인의 살인’인데, 카인의 살인을 둘러싼 여러 사건을 동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판 왼쪽은 형제가 갈등하기 전의 평화로운 모습이다. 아담과 하와가 초가를 짓고 앉아있고 카인은 밭을 갈고 아벨은 양을 치고 있다. 중앙 상단에서는 카인과 아벨이 번제를 드리는데,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에 더 흡족해하시며 더 높은 연기를 내신다. 그 아래는 이를 질투한 카인이 아벨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장면이며, 오른쪽 아래에는 “아벨은 어디 있느냐?”라는 하느님의 물음에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딱 잡아떼는 뻔뻔한 카인의 모습이 보인다. 특히 고딕식으로 묘사된 바위가 카인의 난폭함을 대변하는 듯하다.
세 번째 주제는 ‘노아 이야기’이다. 동판의 중앙에는 거대한 피라미드 모양의 방주를 열고 물이 마른 세상으로 나온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짐승이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는 감사의 번제를 드리는 노아가, 왼쪽 아래에는 술에 취해 옷을 벗고 쓰러져 잠이 든 노아를 발견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께 옷을 덮어드리면서 아버지의 알몸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린 세 아들이 묘사되어 있다.
네 번째 주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희생’으로, 왼편에는 아브라함이 세 손님을 맞고 있으며,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부인 사라의 임신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 옆으로는 이 소식을 듣고 천막에서 나오며 믿지 못하겠다는 웃음을 짓는 사라가 보인다. 그리고 위편에는 칼을 들어 제단 장작 위에 놓인 아들을 죽이려는 아브라함과 이를 만류하는 천사의 모습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편 아래에는 하느님께서 이사악 대신 번제물로 준비하신,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이 보이고 아브라함이 대동한 하인들이 잡담을 하고 있다.
다섯 번째 주제는 ‘야곱과 에사우’이다. 오른쪽 위에는 지붕 위에 올라가 아들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레베카가 보이고, 중앙 뒤편으로는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파는 에사우가 있다. 중앙 아래에는 에사우를 사냥 보내는 이사악이, 오른쪽 뒤로는 사냥하러 산을 오르는 에사우가 보인다. 그 아래로는 야곱이 살진 염소를 어머니 레베카에게 전하는 장면이며, 오른쪽 아래에는 레베카가 지켜보는 가운데 에사우 대신 야곱에게 축복을 내리는 이사악이 묘사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바닥의 마름돌과 천정이 하나의 소실점을 갖는 원근법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아울러 왼편 세 여인의 몸의 표현 형식과 옷주름 등에서 고대양식의 모방이 돋보이는 등 르네상스 회화의 기법이 차용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섯 번째는 ‘요셉 이야기’이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은 어느 날 왕이 되는 꿈을 꾸었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요셉을 시기하던 그의 형제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요셉을 죽이려다 요셉을 이집트 상인에게 팔아넘겨 버렸다. 탁월하게 꿈을 해몽하여 이집트 왕의 총애를 받게 된 요셉은 총리대신이 되고, 기근에 시달리던 고향의 형제들을 구해주게 된다. 여섯 번째 동판은 흉년에 곡식을 구하러 온 요셉의 형제들과 벤야민의 자루에 숨겨진 황금잔을 찾아낸 뒤 요셉이 형제들을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동판의 배경이 되는 원형건물에도 수학적인 원근법이 적용되어 있다.
기베르티는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이야기와 인물들을 한 화면에 묘사하는 동시적 기법의 방식을 사용하였다. 일곱 번째 칸에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장면과 시나이 산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여덟 번째 칸에는 이스라엘 군이 요르단 강을 건너 예리코를 함락하고 돌 기념비를 세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아홉 번째 칸에는 다윗이 적장 골리앗의 목을 베어 죽이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이,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칸에는 스바의 여왕이 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솔로몬 왕을 방문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1401년 공모전을 시작으로 1424년에 북쪽 문, 1451년에 동쪽 문에 이르는 기베르티의 50년에 걸친 오랜 성스런 작업이 끝났다. 이런 장구한 세월을 통해 기베르티가 추구한 것은 과거의 모호하고 비현실적인 표현기법에서 탈피하여 인물과 동작 하나하나에 사실적이고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기베르티는 ‘청동 화가’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으며, 서양미술의 역사에서는 공모전이 시작된 1401년을 르네상스 미술의 원년으로 본다.
기베르티는 새롭게 태동한 르네상스의 기운으로 하느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조형적으로 전한다.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말씀만을 생각한 채, 하느님의 이야기를 우리 각자의 마음에 남기고자 한 기베르티의 작업은 인간 모두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비추기를 바라는 성스러운 기도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런 자신의 예술적 의도를 영원히 전하려는 것인지, 기베르티는 이 청동문에 자신의 실물 초상을 끼워두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한 예술가의 이런 역사(役事) 앞에서, 잠시나마 오늘의 신앙이 세속의 유혹과 쾌락의 유희라는 찰나의 욕망으로 퇴색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반성해 보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도 가치가 있는 일일 것이다.
이 세 번째 문은 오랜 세월 먼지에 덮여 거무스름했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 도로에서 튄 작은 돌 자국을 수리하다가 우연히 황금빛 찬란한 원래의 모습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66년에는 180㎝ 이상의 물이 들어차는 엄청난 홍수로 심하게 훼손된 것을 복원해서 성당 옆의 박물관으로 옮겼고, 오늘날 원래의 자리에는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학석사를,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예술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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