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 주일
두치오 디 부온인세냐 (Duccio di Buoninsegna ; 1255-1318) 마에스타 (예루살렘 입성) 뒷면 중앙 패널 1308-11년, 나무 패널에 템페라, 시에나, 두오모 박물관 DUCCIO di Buoninsegna, Entry into Jerusalem, 1308-11, Tempera on wood, 100 x 57 cm, Museo dell`Opera del Duomo, Siena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요한 12,12-19(마태 21,1-11 ; 마르 11,1-11 ; 루카 19,28-38)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올리브산 근처 벳파게와 베다니아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이르셨다. "맞은 편 마을로 가 보아라. 거기 들어 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왜 그러느냐고 묻거든 주님이 쓰신다 하고 곧 돌려 보내실 것이라고 말하여라." 그들이 가 보니 과연 어린 나귀가 길가로 난 문앞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푸는데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이 "왜 나귀를 풀어 가오?" 하고 물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일러 주신 대로 말하자 그들은 막지 않았다. 제자들은 새끼 나귀를 끌고 예수께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았다. 예수께서 거기에 올라 앉으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 놓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들에서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라 오는 사람들이 모두 환성을 올렸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이윽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 가셨다. 거기서 이것 저것 모두 둘러 보시고 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그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아로 가셨다.
올리브산은 메시아 대망이 실현될 곳이라고 예견된 곳이다. "그 날(마지막 날), 그가 예루살렘 동편에서 마주보고 있는 올리브산에 우뚝 서시면...(즈가 14,4)"이라는 초기의 묵시전승이 전해진다.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그 날` 이스라엘의 원수들과 최후의 결전을 벌여 예루살렘을 지키시기 위해 올리브산에 나타나실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께서는 입성 행렬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신다. 이 이야기는 예수의 초자연적인 신통력을 드러내는 기적 이야기인가? 아니면 하나의 상징적 사건인가? 대부분은 예수의 놀랄 만한 예견력과 권위에 관한 또 다른 예로 여긴다.
왜 하필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나귀일까? 수도 예루살엠을 찾아오는 임금은 "겸비하여 나귀,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즈가 9,9)리라는 옛 예언이 그 바탕이다. 이 구절에서 강조되는 점은 새끼나귀로 표현되는 구세주의 겸손하고 비천함(하느님 또는 그리스도와 거의 연관시켜 볼 수 없는 나귀)과 그 나귀에 감추어진 그분의 존귀함이다. 아울러 그분의 나라가 평화의 나라라는 점이다.
이 단락의 절정은 입성행렬에 있다. 나귀 위와 길바닥에 겉 옷을 까는 행위는 대관식 때 임금에게 경의를 표하는 풍습을 반영한다. 사람들이 외친 `호산나`는 성전에 가까이 온 순례자들이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 할렐 시편(113-118)의 마지막 구절인 시편 118,25-26의 인용이다. 시편에서 `호산나`의 문자적 의미는 하느님께 구원을 청하는 기도인 `(하느님) 지금 구하여 주소서` 또는 `(하느님) 구해주소서, 제가 기도합니다` 이다. 이 말은 제관들이 해방절과 초막절 축제에 참례하는 순례자들과 유명한 랍비들을 환영하는 말로도 쓰였다.
사람들은 아직 예수를 `왕`이나 `다윗의 아들`로 명백히 부르지 않지만 이것은 왕에 대한 환호의 외침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구절은 `다윗의 나라`이다. 이미 앞에서 바르티매오가 예수를 `다윗의 아들`로 두번이나 부른 적이 있다. 여기서도 비슷하게 사람들은 예수의 입성행렬을 `우리 아버지 다윗`의 나라의 도래와 분명하게 연결시킨다.
분명히 이 행렬은 메시아로서 갖는 대관식 행렬이다. 그러나 무척 초라한 행렬이다. 그러나 무척 초라한 행렬이다. 예수를 영접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부터 나온 사람들은 없었다(반면에 요한 12,12-19에는 사람들이 맞으러 나온다). 그를 따라온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주변의 미천한 사람들만이 열광할 따름이다. 여전히 예수의 운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승리의 그 때가 왔다는 환호성을 터트린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환호에 응답하기는커녕 입성 내내 침묵을 지키신다. 그분의 침묵은 `메시아인 내가 구원하겠지만, 너희의 기대대로는 아니다`라고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의 기대와 예수의 뜻은 여전히 엇갈린다. 이러한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예수께서는 다시금 메시아는 다윗의 아들이 아님을 밝히시고(12,35-37),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은 그분을 죽이라고 외치게 된다. 예수께서 곧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리라는 사람들의 사람들의 열광적인 기대는 어긋났지만 그분을 메시아로 본 것은 옳다는 점에서 이 단락은 매우 역설적이다. 그분은 그들의 말과 생각을 넘어서는 왕이며, 그분의 왕국은 그들이 감히 생각조차 못하는 나라이다.
교회는 매년 성주간의 `주의 수난 성지주일`에 이 입성 기사를 봉독한다. 나무가지를 든 신자들은 그 때의 사람들처럼 환호한다. 그러나 왜 환호하는지, 그들의 의도와 우리들의 뜻, 그들의 실패와 우리의 한계를 깊이 헤아리는 게 필요하다. 아울러 우리의 주위를 그분의 침묵에 돌려 그 침묵에 담긴 풍성한 뜻을 곰곰이 되새기는 게 더욱 필요할 것이다. 우리도 그들처럼 그리스도의 진정한 모습과 정체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절박한 요청을 늘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그분을 계속 다르는 사람들은 겸비하신 그분의 힘을 나누어 받게 되리라는 희망 역시 놓치지 않고 말이다.
The Triumphal Entry; Entry into Jerusalem, 12th Century Mosaic (Plate IV-1)
Entry into Jerusalem, 1305-1306 Padua, Italy_Giotto
Entry into Jerusalem, 1305-1306 Padua, Italy_Giotto
Entry Into Jerusalem_Icon
Assisi Frescoes entry into Jerusalem pietro lorenzetti
The Entry Into Jerusalem
The entry into Jerusalem_logIcon
Entry into Jerusalem
Triumphal entry into jerusalem
Christ's Entry into Jerusalem, 1842_Hippolyte
procession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_tissot
Hosanna_Tom duBois
Entry Into Jerusalem_Pedro Orrente c.1620
Christ's Entry into Jerusalem_Benjamin Robert Haydon (1786-1846), Oil on canvas 1814-1820
The Coming of the Magi and Jesus' Entry into Jerusalem The Detroit Stained Glass Works (originally Friederichs and Staffin), 1919. Ste. Anne de Detroit Catholic Church Detroit, MI
Jesus' triumphal entry into Jerusalem, which occurred less than a week before he died, is depicted in this illumination from Jean de Berry's Book of Hours (Les tres belles heures de Notre-Dame). The illumination on parchment, c. 1409, is now owned by a museum (the Museo Civico d'Arte Antica, Palazzo Madama) in Turin, Italy.
Triumphant_Entry into Jeru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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