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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빈민가의 예수 1920-24년, 조지 루오

by 파스칼바이런 2012. 12. 4.

 

빈민가의 예수 1920-24년, 조지 루오

(Georges Rouault, 1871-1958)

캔버스에 유채, 92 x 74cm, 동경 브릿지스톤 미술관, 일본.

 

 

직선으로 길게 뻗은 대로변에는 허름한 빈민촌 풍경이 쓸쓸하고, 짙푸른 하늘에는 눈부시게 밝은 달, 즉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희망을 비추어주고 있다. 큰 길 중앙에는 흰 복장의 예수님께서 두명의 어린이들을 위로하며 빛의 세계로 인도해주고 있다. 이 지상에서 버림받은 외롭고 가난한 이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예수님께서는 그의 끝없는 사랑으로 이들을 기꺼이 거두어주고 상처받은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여기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인생의 길을 따라가노라면 우리는 어느덧 '빛' 즉, '영원한 진리'와 만나게 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종교화가 루오는 강렬한 색채와 단순한 형태로 표현한 야수파 경향으로 활동하다가 점차적으로 거친 마티에르(matiere : 질감) 느낌이 강렬한 스테인드글라스의 검은 납선과 색유리 조각이 연상되는 독창적인 화풍을 창안하여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구사하였다(작품해설 : 박혜원 소피아).

 

조르주 루오(Georges-Henri Rouault, 1871년∼1958년)는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이다.

루오는 14세 때에 글라스 그림을 그리는 공방(工房)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의 복원 수법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4년 후에 미술학교에 입학, 포브의 스승인 모로의 지우를 얻는 바가 되었다. 처음에는 모로의 화풍을 따랐으나, 스스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그는 "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느낄 수 있는 것뿐이다." 그는 이처럼 비합리적 세계에서의 계시(啓示)를 어둔 밤 속에서는 빛나는 별을 인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예술적 탐구는 완성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완성해 낼 수 없는 것의 극(極)을 다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참다운 예술은 열렬한 고백을 토로할 수 있는 까닭에 가치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암야(暗夜)의 절규이며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울음소리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극점에 서서 루오는 단언하기를 '구세주로서 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했다. 이 동안의 소식을 여실히 말해 주는 것으로 판화집 <미세레레>(1948년 발표)가 있다. 1913년 루오는 화상(畵商) 볼라르에게 인정을 받아 아틀리에를 제공받음과 동시에 일정한 금액으로 전작품을 인수받게 되었다. 1917년에는 역시 볼라르와의 계약으로 한때 유채화를 중지하고 판화에만 전념하였으나, 이것이 일반 사람에게 공개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이런 것에서도 그가 시류(時流)에서 멀어져 가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는 용이하게 완성을 인정하지 않는 화가이어서, 독특한 에나멜을 칠한 것과 같은 중후한 마티에르와 농밀(濃密)한 색채로 덮인 작품으로 완성이 될 때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이 소요되었다. 1948년 볼라르의 유산 속에 들어가 있던 약 3백점 이상의 작품을 재판에 의하여 되돌려받았을 때에도, 벌써 이것들을 마음대로 가필 수정할 여력이 없다고 하여 아낌없이 태워버렸던 것이다. 판화 때문에 중단된 유채화의 제작을 다시 시작한 때는 1929년이며, 이 때부터 그의 명성은 높아졌으나 이후 87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루오는 현대 화단에 초연한 성화상(聖畵像)의 화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검고 굵은 선을 즐겨 썼는데, 그것이 색채와 어울려서 종교적인 깊이를 느끼게 한다. 그의 그림 소재는 거의 모두가 법관·창녀·어릿광대·기독교인 등의 인물과 도시의 뒷골목 풍경으로 한정되어 있다. 작품으로 <교외의 크리스트> <재판> <붉은 코의 어릿광대> <베로니카> 등이 있고, 판화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