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발현과 성인 이야기]
성 필립보 네리에게 나타나신 성모
Carlo Cignani, 성 필립보 네리에게 나타나신 성모,
1715, Civica Pinacoteca, 이태리
성 필립보 네리는 151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중산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으며, 어머니는 건축업자의 딸이었다. 귀족 가문이었던 아버지는 집안으로부터 물려받은 땅도 있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생계에 큰 어려움을 모르고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필립보가 5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후 아버지는 재혼을 했는데, 새어머니는 사랑이 넘치고 쾌활한 성격으로 필립보를 친자녀처럼 정성을 다해 키웠다. 그 결과 필립보는 착하고 밝은 성격으로 자랄 수 있었고, 주위에 친구들도 많았다. 그리고 신앙심도 뛰어나 거의 매일 침실 창문턱에 기대서서 명상에 잠기며, 특히 시편을 자주 암송했다고 한다.
필립보는 학문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라틴어로 된 수많은 책을 읽으며 지적 능력을 높여나갔다. 특히 그가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책 중에는 영적 독서 이외에도 우화집이 많았다. 그는 우화집에 나온 익살스런 이야기와 농담을 어른이 된 후에도 자주 인용하곤 했다. 필립보는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도회 특히 도미니코회 수도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필립보는 어느덧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놓치기 아까워하는 인재로 성장했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용모, 그리고 깊은 신심에 풍부한 유머감각까지. 사제가 되기에 나무랄 데 없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필립보는 전혀 뜻밖의 선택을 한다. 아들이 없었던 필립보의 친척 아저씨가 편지를 보내와 자신의 사업을 물려줄 후계자가 필요하다며 그를 양자로 삼겠다고 했다. 필립보는 그 제안에 흔쾌히 응하고 1532년 가을 어느 날, 친척 아저씨의 양자가 되기 위해 피렌체를 떠났다. 필립보가 도착한 곳은 베네딕토 대수도원이 우뚝 서 있는 몬테카시노를 마주보는 마을이었다.
몬테카시노는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인 베네딕토 성인이 529년경부터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서방 수도원의 발생지가 되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건립했으며, 높은 성덕과 지혜로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게 했던 곳이다. 이 유서 깊은 대수도원의 맞은편에 친척 로물로 아저씨의 화려한 대저택이 있었다. 그러나 화려하고 풍족한 의식주는 필립보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자주 드나들면서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어떤 것을 수도자들의 삶에서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에게 부자 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떠올려주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 21). 필립보는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못한 부자 청년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지금 당장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침내 필립보는 자신에게 보장된 모든 재물과 권리와 미래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친척 아저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533년 카시노를 떠나 로마로 향했다. 로마에서 필립보는 스스로 선택한 가난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기도와 공부에 매진했다. 로마에서 보낸 첫 두 해 동안 필립보는 친구의 집에 기거하며 그의 두 자녀들의 가정교사를 했다. 그때 그는 최소한도로 필요한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대가도 받지 않으면서 의식주에서 실질적인 가난과 극기의 삶을 추구했다.
그는 상당한 시간 동안 로마 시내 성당과 초대 교회 그리스도 교인들의 지하묘소인 카타콤바를 순례하면서 기도하며 지냈다. 1535년부터는 로마 사피엔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여 “재능이 매우 뛰어난 사람”, “뛰어난 신학자가 될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되었지만 지식을 구가하는 학문은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기에 학문을 내려놓고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찾아 공부하던 책을 몽땅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것은 그가 하느님께 한 발짝 더 다가서는 방법이었다. “지금 당장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들이 언제까지나 나를 기다려주진 않습니다.”
그때부터 필립보는 로마 거리나 시장을 돌아다니며 하느님과 하늘나라를 전하고 가르쳤다. 가정, 병원, 상점을 방문하여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존재를 일깨우고 그분의 사랑을 전해주면서 그들의 가슴에 신앙의 불을 다시 지폈다. 또한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에게도 다가가 그들을 완덕으로 이끌었다. 필립보의 노력은 점차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교회에서 등을 돌리려다가 필립보에게서 감동을 받아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다시 교회로 돌아온 사람들이 무수했다.
성모님의 중재의 힘 여러 번 체험
1555년 5월 23일 필립보 네리는 36세에 성 토마스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필립보 네리 신부는 그때부터 1583년까지 성 예로니모 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뒤늦게 사제의 길에 들어선 필립보 네리 신부의 일상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고해성사에 할애해 시간이 날 때마다 신자들이 언제든지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무렵에 오라토리오회가 생겨났다. 필립보 신부는 고해성사 외의 시간에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과 젊은이들과 동료 사제들과 함께 기도하고 영적 대화를 나누고 고해성사를 주곤 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사제관이었지만 참석자가 많아지면서 경당, 곧 오라토리오에서 그 모임이 열렸다. 이로써 오라토리오는 그 공간의 이름이자 필립보 신부가 이끄는 단체의 고유한 이름이 되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은 현시나 황홀경에는 커다란 위험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들에 대해 매우 조심했다. 현시들은 지나친 상상에서 올 수도 있으며 혹은 악마로부터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성인은 성모님의 중재의 힘을 여러 번 체험했고, 또한 실제로 성모님을 보았던 적이 종종 있었다. 성인은 말년에 라 키에사 누오바 성당의 건축을 감독하였는데,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실제로 복되신 동정녀께서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주된 목재들 중 한 개를 떠받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일꾼들을 보내어 그 부분을 조사해 보니, 금방이라도 무너지기에 충분했으나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8월호, 장긍선 예로니모(신부,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