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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만 명의 순교 - 뒤러

by 파스칼바이런 2014. 10. 15.

 

 

 

만 명의 순교 - 뒤러

1508, 캔버스화(패널에서 옮겨짐), 99x87cm, 빈 미술사 박물관

 

 

[말씀이 있는 그림] 만 명의 순교

 

뒤러(1471~1528, 독일 르네상스 화가)의 ‘만 명의 순교’ 작품은 서기 4세기 페르시아 왕 샤푸르 2세가 아르메니아에 아라라트 산 위에서 초기 그리스도교들인 만 명의 병사와 지휘관 아카티우스를 학살하는 장면이다. 뒤러를 아낌없이 후원했던 작센 선제후인 현자 프리드리히가 비텐베르크 궁정 예배당의 성물실에 걸기 위해 의뢰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이 성물실에 수많은 유물 컬렉션을 수집해서 보관하였는데, 그 가운데 일만 순교자의 유물도 몇 점 소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순교자 유물의 유래에 관해 설명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초목지와 절벽 사이 숲에는 총 130여 명의 작은 크기의 인물 무리와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고 있는 모습이 화면 전체에 그려져 있다. 화면 맨 앞에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 눈이 가려진 채 무릎을 꿇고 참수를 기다리는 사람, 이미 참수형을 당한 사람, 휘두르는 망치에 죽어가는 사람 등으로 바닥은 피로 불게 물들여 있다. 이 장면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잔인한 사형 집행을 주도한 인물은 오른쪽에 긴 수염에 흰색 터번을 쓴 채, 말을 타고 지휘봉을 손에 들고 있다. 마치 술탄처럼 보이는 이 인물의 학살 지휘는 계속해서 뒤쪽 배경까지 이어지고 있다. 절벽에서 그리스도인 무리는 바위와 가시덤불에 던져지고 양손은 묶인 상태로 돌로 내리 맞고 있다. 화가는 당신 만 명의 순교 사건을 개별 장면에 초점을 맞추어 생생한 표현으로 극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림 중앙에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서 있다. 오른쪽은 뒤러 자신이고, 왼쪽의 키가 조금 작은 사람은 뒤러의 친구였던 대학 교수이자 독일 최고의 인본주의자인 콘라드 켈티스이다. 두 사람의 검은 복장은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뒤러가 입은 검은색은 순교자들의 무고한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상복이고, 켈티스의 검은색은 교수의 복장이다. 뒤러 자신의 서명을 손에 들고 있다. 라틴어로 “우리의 주님이 탄생하신 지 1508년째 되는 해에 독일인 알브레히트 뒤러가 이 그림을 그렸다.”고 쓰여 있다. 뒤러는 화가로서 자존감이 남달랐기에 그의 많은 작품 속에 자신의 모습을 포함시키거나, 개별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친구 콘라드 켈티스(빈에서, 1508년 2월 2일)의 경우, 뒤러가 1508년까지 ‘만 명의 순교’ 작품에 매달리던 중,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본인의 모습과 함께 옛 친구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려 넣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가톨릭 역사도, 특히 대원군의 박해는 1866~1876년 사이 성직자가 없는 교회였고, 혹독한 박해로 비공식적으로 약 만 명에 이르는 교우들이 목숨을 천주께 바쳤다고 집계되고 있다. 박해는 남녀노소 막론하고 마구잡이로 대량학살을 자행하여 조선의 강토를 피로 물들였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미사 강론 중, 2014. 08. 16)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2014년 9월 21일  윤인복 소화 데레사 교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