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정화 - 엘 그레코
1600년경, 캔버스에 유채, 42X52cm, 프릭 콜렉션, 뉴욕
[말씀이 있는 그림] 성전정화
그리스 출생의 엘 그레코(El Greco, 1541년경~1614년)는 그의 예술 활동 대부분을 스페인 톨레도에서 이루었다. 그는 성경 이야기나 성인들처럼 신앙심이 깊었던 사람을 주제로 선택하여 비사실적, 비현실적 색감을 통해 이야기의 구도를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창조하였다. 작품 <성전정화>에서도 성경의 이야기를 극적인 감동으로 새롭게 표현한 엘 그레코의 화풍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이 오자 예루살렘 성전에 방문했다. 4복음서 모두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갔을 때 불경스럽게 더럽혀진 성전을 보고 격렬하게 분노를 일으키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성전정화’ 내용을 다룬 그림은 중세 전반에 걸쳐 그려지긴 했지만 자주 등장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 주제는 바로크 시기 미술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 까닭은 교회사적 이유와 바로크 미술의 역동적이면서 장중하며, 열정적인 특징들이 이 그림에서 보이는 상인들의 뒤엎어진 가판이나 쓰러진 사람들, 분노하는 예수님의 동작들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화면 앞쪽은 온통 장사치들의 상거래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한다. 성경에서는 성전 뜰이 온통 제사 지낼 때 쓸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과 외국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 환전상들로 점령당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전은 조용히 기도하는 집의 분위기를 잃고 북새통을 이루는 시장판 같았다. 그림 속에도 예수님의 채찍을 피하는 상인들의 행동, 나뒹구는 탁자를 집으려는 사람, 우왕좌왕하며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 등으로 떠들썩하다. 중앙에 붉은 옷을 입은 예수님은 분노하여 손에 채찍을 들고 힘을 다해 그들을 성전에서 몰아내고 있다. 예수님은 채찍을 든 오른팔을 힘있게 들어 분노를 표출하고, 예수님의 강한 카리스마는 화면 전체를 제압하고 있다. 예수님은 흩어져있는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신다. “또 쏟아 버리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요한 2,15)
그림 위쪽, 중앙 아치문 양쪽 벽에 그려진 부조는 주제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왼쪽은 아담과 이브가 ‘낙원으로부터의 추방’되는 장면이고, 오른쪽에는 ‘이삭의 희생’ 장면이다.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하느님의 진노를 초래한 것으로, 더럽혀진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와 깨끗이 함을 예고하는 것이며, 불순종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말하고 있다. ‘이삭의 희생’ 장면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구약의 원형임으로 결국 여기에서는 순종과 회개를 의미한다. 화가는 중앙에 예수님을 사이로, 오른쪽은 예수님을 따르는 회개한 사도들로 넉넉한 공간에 안정되고 평온한 분위기를 표현하지만, 왼쪽은 회개하지 않는 장사꾼들로 비좁은 공간에 괴로워 몸부림치는 것이 몹시 어수선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모습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교회를 수호하는 세력과 교회에 저항하는 세력을 갈라놓는 최후의 심판자를 연상케 한다.(마태 25,31-46 참조)
그림 속 성전은 웅장한 기둥들로 이어진 벽을 이루고, 바닥 장식과 아치형 건물 입구 뒤로 깊은 공간이 보인다. 화가는 이 작품에서 인물들을 깊은 공간 속에 배치하고, 건축적인 요소를 배경으로 강조하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2014년 11월 9일 윤인복 소화 데레사 교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