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김학중 시인
1 눈먼자가 처음 그 벽에 부딪쳤을 때 벽이 거기 있다는 그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벽을 발견하게 된 것은 눈먼자가 자신의 몸을 뜯어 그린 벽화를 보고 나서였다.
2 벽화는 아름다웠다. 거친 손놀림이 지나간 자리는
벽의 안과 밖을 꿰매놓은 듯했고 스스로 빛을 내듯 현란했다. 색색의 실타래들이 서로 몸을 섞어 꿈틀대는 그림은 벽에서 뛰쳐나가려는 심장 같았다. 그 아름다움은
벽의 것인지 벽화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벽화를 본 사람들은 구토와 현기증을 호소했다. 그들은 벽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환희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감각을 느끼며 벽화를 벽에서 뜯어내기 시작했다. 벽화가 부서지고 있었다. 벽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3 벽화의 잔해를 손에 쥐고 나서야 사람들은 거기 벽이 있었음을 알았다. 벽화를 그린 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그 자를 눈먼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를 부를 이름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붙인 이름 아닌 이름
벽을 나누어 가지고도 벽을 볼 수 없었던 자들은 흩어지며 그 이름만을 나누어 갔다.
시집 『창세』(문학동네, 2017) 중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원호(禹原浩) 시인 / Kiss 1 외 1 (0) | 2019.02.19 |
---|---|
함태숙 시인 / 눈다랑어 이야기 (0) | 2019.02.18 |
조원 시인 / 지구 관리인 (0) | 2019.02.17 |
최순섭 시인 / 플라스틱 인간 (0) | 2019.02.17 |
최대남 시인 / 맨발의 무희 (0) | 2019.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