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궐도안(西闕圖案)에 들다 이난희 시인
나는 낮에는 마음을 졸이고 밤에는 방안을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조, 『존현각 일기』
이제 괜찮아? 살아 본 적 없는 존현각 주변을 살피며 여덟 살 소년에게, 성년이 된 청년에게 묻고 싶어진다
살수(殺手)들의 칼끝은 집요하게 검은 지붕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하랴 흉도들의 수중지물(手中之物)에서 빠져나오려고 책을 읽는다 두려움의 낱말을 적기엔 피를 말리는 밤이었으므로
정유년, 그 여름밤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두려움의 끝을 볼 수 없었으므로 그날도 책을 읽었다. 촛불은 기침소리도 없이 도처의 의심을 살폈다. 누군가 내가 앉은 지붕 위를 밟고 다가오다 멈춘다. 정체불명의 세계가 오고 있다. 방 안의 것들은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나의 두려움을 마시고 흥청거리던 살수殺手들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듯 깨진 기왓장과 흩어진 모래와 자갈을 남겨두었다. 달은 벼랑 끝에서 기울어지고 있었다. 잿빛 구름이 치열하게 주춧돌을 붙들고 서 있었다.
낡은 화폭 속 전각의 시간은 비로소 평안하다 두려움과 싸웠던 왕의 시간을 문신으로 새긴다
*서궐도안(西闕圖案), 보물 제 1534호로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경희궁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어 서궐도라 붙여졌으며 존현각은 경희궁의 여러 전각 중 하나였으나 일제 때 헐려 남아 있지 않다. 정조 즉위 1년 존현각에서 7월 28일, 8월 11일, 자객이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2월호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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