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 시인 / 더미
이곳에 오면 사람의 얼굴을 한 것은 모두 더미가 된다
옆구리에 낀 너의 가방 속에 이미 한 방을 맞아 코뼈가 나간 자존심과 이빨이 부러진 진술들이 들어 있다
너는 뭔가에 홀린 게 틀림없다 밤마다 주기도문을 외우며 커피가 아닌 컵의 피를 마셔야 하는 운명 투 샷으로 추가된 달빛을 여명에 타서 마신다
컵라면을 향한 그 죽일 놈의 사랑도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건져 올린 건 피살자의 곱슬머리 뿐
이 짓도 그만 해야겠다고 혼잣말로 고해를 하지만 더미들이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한다
월요일 더미, 수요일 더미, 더미와 더미 사이에서 너는 압사한다
인간들은 추모하고 더미들은 분노해도 어제의 더미 위에 오늘의 속보가 도배된다
항우울제를 복용한 제국이 네 파손된 머리에 기꺼이 지폐 몇 장을 꽂으며 떠난다
함구된 너의 비명 달의 뒷면에 무수한 네가 더미로 쌓여있다
갈래갈래 찢어져 펄럭이는 바람의 입가 너의 행방을 찾을 수 없다
*더미dummy : 실험용 인체 모형
웹진 『시인광장』 2019년 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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