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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혜민 시인 / 사자를 꿈꾸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3. 13.

이혜민 시인 / 사자를 꿈꾸다

 

 

검은 색은 두렵다.

 

밤마다 외딴집 목줄에 묶인 그가 검정을 물어뜯고 있다. 서로 한 치 양보도 하지 않는다. 하얀 이빨로 물어뜯으면 검정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지만, 어디에도 없다. 산지사방 가득 출렁거리며 콧잔등에도 이빨 새에도 꼬리에도 발톱에도 있지만 죽은 듯 안으로 숨을 파먹고 있다.

 

흰 이빨의 숫자를 검은색은 알고 있다. 개의 눈알에 여전히 검은 호수가 출렁인다. 발바닥이 물속에 닿을 수 있어도 한 오금도 달아나지 못한다. 매질에 두 손 쭉 뻗고 항복했던 앉은뱅이는 안다. 시간의 문이 열려도 밖으로 튀어나가지 못한다는 걸, 어둠의 시간이 그래서 휴식이 없다는 걸.

 

그는 검정 이빨을 아귀처럼 밤새 씹을 셈인가.

 

이미 내장 깊숙이 고개를 처박고 피를 빨고 있다. 마지막 뼈다귀를 물고 더 없냐고 으르렁거리며 제 영역을 표시하는 소리.

 

언 땅에 몸을 숨긴 애벌레들까지 더 납작 엎드려 숨을 고를 때 고요의 뒷면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푸석한 어둑새벽이 파란 이빨을 갈며 기어온다.

 

계간 『애지』 2018 년 여름호 발표

 

 


 

 

이혜민 시인 / 나를 깁다

 

 

거울 속에 꿈틀거리는

날개 같은 것이 한 자루 가득.

쉼 없는 쉼을 위해 얼굴을 가리고 있다.

어디서부터 마름질이 어긋난 걸까.

햇살 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며

박음질부터 해댄다.

담장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유년의 얇은 천과

날고 싶어 하는 날개가 청춘을 누비며

한 벌 몸뚱이를 깁는다.

 

어디를 가나 모습과 질감이 똑같은,

어지간한 오염에도 물들지 않는 원단

늘 빡빡 문질러서 빨아야하리.

그러나 따뜻한 손길이나 입술엔 취약해

고문 단속을 당하기도 한다.

 

나를 가리고 있는 천을 수선할 때마다

빗방울처럼 떨어져 번지는 눈물

무명의 노루발로 박음질을 하는

난, 한 폭의 생을 깁는다.

 

계간 『문학과 오늘』 2018 년 가을호 발표

 

 


 

 

이혜민 시인 / 오선지 위의 반음표

 

 

지하철이 낳고 키워온 한 사내가

울음을 반죽하고 있다.

 

계단과 계단 사이에 살고 있는 깨진 노래.

 

절룩이는 음표를 밀며

흩어지는 소리를 공중으로 끌어 모아

건반을 누른다.

 

술에 취해 허우적대는 동안

노래는 저 혼자 몇 번을 되돌이표로 돌아갔다.

 

계단을 떠받히고 있는 어긋난 박자.

 

어둠이 소리를 내다 버리는 밤.

깨진 노래가 살고 있는

계단을 버리는 한 남자도 있다.

 

시집 『나를 깁다』 (문학과사람, 2018) 중에서

 

 


 

 

이혜민 시인 / 갈 때

 

 

내려앉은 구름 속으로

늙은 갈대가 흰 머리 풀어 헤치네.

까치발로 도리질하며

앙상한 뼈 마디마디에서 신음소릴 토하네.

 

뒷산 그늘에 숨어 우는 뻐꾸기 소리에

잿빛 물이 들고

왁자하게 모여든 까치 울음소리도

누런 베옷을 걸치고 서성대네.

들락거리던 바람의 날갯짓조차 숨을 죽이네.

 

시계 초침 돌아가는 무거운 해거름이

북녘 하늘에 노을을 걸어두네.

영생원 까마득한 굴뚝에서 피어오르네.

위험한 경계에 발목 잡혀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잔인한 시간.

 

달빛 푹 패인 발자국을 따라 하늘 길 나서고 싶어

몇 번 이고 몇 번이고 문고리를 잡네.

칼바람도 뒤따라 넘어 가네.

흐느끼던 얇은 그림자 하나

입 벌린 채 잠이 드네.

 

숨이 아직도 뜨겁네.

 

시집 『나를 깁다』 (문학과사람, 2018) 중에서

 

 


 

 

이혜민 시인 / 숨겨진 발톱사이(자유)

 

 

목줄의 배신으로 탈출하지 못한 어둠이 그의 전체를 뒤덮고.

태반을 두르고 새끼를 찾아 헤매어도 쇠사슬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어.

꿈속에서도 양털 목도리를 두르고 초원을 찾아 내달리는지

하루 반나절이 지나서야 제자리로 돌아 왔어.

늘 울먹한 까만 눈망울은 먼 데를 바라고 있었지.

 

목줄을 버리고

뜬 구름 잡고 흘러가고 싶은 날.

하늘 문이 열렸는데 오르지 못하던

그런 날이 내게도 있었지.

 

침대 모서리에 박혀

들숨은 안으로 고이고 썩어들었지.

역한 냄새 흘리며 하루에도 몇 번씩

눅눅한 침대 밑으로 기어들었지.

 

그래 죽는다는 건 말이야

또 다른 해방인지 몰라.

 

혼자 태반 씹던 피의 맛을 그도 알까.

 

사이와 사이가 품은 멀고먼 곳,

웅크린 채 손짓하는 고샅길.

숨겨진 발톱 사이에서

아직도 끈질긴 세포가 자꾸만 밖으로 밀치고 있네.

 

계간 『애지』 2018 년 여름호 발표

 

 


 

 

이혜민 시인 / 지팡이는 자꾸만 아버지를 껴입어

 

 

다리가 열릴 때마다 한 발이 삐끗 넘어지고

다리가 닫힐 때는 몸이 가만히 오므리지.

 

울음이 넘쳐 출렁대는 출렁다리

차라리 바람 소리로 시끄러웠으면 좋겠어.

천둥 번개라도 찾아 왔으면 해.

 

쇳소리만 입 안 가득 한숨을 물고

가족들은 소리에 끌려 다니지 아니

소리에 달라붙지.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듯 주저앉아

살아 온 날들을 모래알처럼 굴려.

 

아버지를 껴입은 늙은 지팡이가 자국 한번 짚어 내는데

눈자위가 움푹 파인다고

말린 눈물 꽃 걸어 두려 허공에 못을 박고 있지.

 

계간 『애지』 2018 년 여름호 발표

 

 


 

이혜민 시인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 2003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토마토가치마끈을 풀었다』와 『나를 깁다』, 전자책 시집『봄봄 클럽』이 있음.  2006년 경기문화재단 기금과  2018년 성남시 문화발전기금 수혜. 현재 경기민예총 문학위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