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시인 / 95 청량리―서울대
기껏 토큰 한 개를 내미는 나의 무안함을 너는 모르고 졸고 있는 너의 야근과 잔업을 나는 모르고 간밤엔 빤스 속에 손 한번 넣게 해준 값으로 만 원을 가로채간 년도 있지만 지금 내가 내민 손 끝에 광속(光速)의 아침 햇살, 빳빳하게 밀리고 있구나 참 멀리서 왔구나, 햇살이여, 노곤하고 노곤한 지상에, 그 햇살 받으며 빨간 모자, 파란 제복, 한남운수 소속, 너의 이름, 김명희 너의 가슴에 단 '친절․봉사'의 스마일 마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모성의 누이여 용서하라 나는 왜 이러는지 세상을 자꾸만 내려다보려고만 한다 그럴 적마다 나는 왜 그러는지 세상이 자꾸만 쨘하고, 증오심 다음은 측은한 마음뿐이고,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수평이 아니다 승강구 2단에 서서 졸고 있는 너를 평면도로 보면 아버지 실직 후 병들어 누움, 어머니 파출부 나감, 남동생 중3, 신문팔이 생계(生計)는 고단하고 고단하다 뻔하다 빈곤은 충격도 없다 그것은 네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너의 아버지의 무능 때문이다? 너의 어머니의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서이다? 네가 재능도 없고 지능이 없어서이지 악착 같고 통박만 잘 돌려봐? 그렇다고 네가 몸매가 좋나 얼굴이 섹시하나? TIME지(誌)에 실린 전형적인 한국인처럼, 몽고인처럼 코는 납짝 광대뼈 우뚝 어깨는 딱 벌어져 궁둥이는 펑퍼져 키는 작달 아, 너는 욕먹은 한국 사람으로 서서 졸고 있다 일하고 있다 그런 너의 평면도 앞에서 끝내는 나의 무안함도, 무색함도, 너에 대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모독이며 나의 유사-형제애도, 너에 대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속죄는 못 된다. 그걸 나는 너무 잘 안다 그걸 나는 금방 잊는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1983
황지우 시인 /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零下) 십삼도(十三度) 영하(零下) 이십도(二十度) 지상(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 영상(零上)으로 영상(零上) 오도(五度) 영상(零上) 십삼도(十三度) 지상(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餠煎こすシ觀壙 봄―나무에로, 민음사, 1985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서화 시인 / 고양이 자리 (0) | 2019.02.12 |
---|---|
임지훈 시인 / 쌤소 (0) | 2019.02.12 |
김언 시인 / 방황하는 기술* (0) | 2019.01.22 |
신달자 시인 / 발 1 외 1편 (0) | 2019.01.19 |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중에서 / 이외수 (0) | 2009.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