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 시인 / 발 1
기성화(旣成靴)를 샀다. 누굴 위해 만들어진지도 모르는 것에 순응하는 발
누구를 위해 마련된지도 모르는 길을 나의 집도 아닌 집으로 익숙하게 돌아가는 발
스스로를 헌신(獻身)하여 상실(喪失)되는 회수(回收)할 길 없는 흔적을 남기며
나의 방(房)도 아닌 안개서린 숲으로 고단한 몸을 옮기는 발
언제나 그것은 전진(前進)하나 차단된 상황(狀況)에 허무의 거미줄을 친다. 부단(不斷)히 치면서 그 줄 위를 걷는 발
지나간 시간(時間)의 흔적을 밟으며 집에 이르면 한평짜리 현관옆에 언제쯤 결별(訣別)할 지도 모르는 신발을
소중하게 벗어놓는 숙명(宿命)의 발
그것은 봉사의 섭리(攝理)로 어느 곳이든 말없이 질주(疾走)한다.
봉헌문자, 현대문학사, 1973
신달자 시인 / 발 5
줄 위를 걷는다. 발 끝에 열리는 탐색의 눈
줄이 흔들린다. 불을 켜도 안보이는 당신의 부재 오늘의 물가고에 한발을 헛딛는 어두운 시력 팽팽하게 긴장된 줄 위에서 균형을 잃어가는 춤추는 발
발이 저려온다. 한 발자욱도 뗄 수 없이 저려오는 이 순간의 불구(不具)
미흡한 예감을 따라 걸으며 균형을 잡아보는 정신(精神)의 발
줄 위를 걷는다. 뛰어 내릴 수 없는 이 부재 속의 공존.
餠ï 축제, 조광출판사, 1976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서화 시인 / 고양이 자리 (0) | 2019.02.12 |
---|---|
임지훈 시인 / 쌤소 (0) | 2019.02.12 |
김언 시인 / 방황하는 기술* (0) | 2019.01.22 |
황지우 시인 / 95 청량리―서울대 외 1편 (0) | 2019.01.04 |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중에서 / 이외수 (0) | 2009.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