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사순 제5주일- 영원을 사는 바보가 되자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1.03.21 발행 [1605호]
밀알을 땅에 심으면 그 속에서 껍질이 썩으면서 씨앗 속에 들어있던 ‘생명’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웁니다. 그 싹은 땅속의 물과 햇빛을 머금고 자라서 추수 때가 되면 밀알 하나당 대략 마흔 개 정도의 낱알이 맺히는데, 그렇게 쌓인 밀알을 계속해서 땅에 심고 또 썩어 열매 맺는 과정을 몇 해 반복하면 금세 1억 개 이상의 밀알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은 이런 맥락에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을 겁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들은 ‘세월의 무게’를 오래 견뎌내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늙어가다가 결국 사라지고 말지요. 그러나 ‘한계’라는 껍질을 벗어던지고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되면 ‘영원’의 시간을 살게 됩니다. 밀알에게는 ‘죽는’ 과정, 즉 이 세상에서 얻은 것들을 온전히 내려놓고 자연의 ‘섭리’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과정이 ‘고양’에 해당합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혼자’뿐인 유한한 삶에서, ‘함께’하는 영원의 삶으로 옮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유한한 삶에서 ‘천국’이라는 영원의 삶으로 ‘고양’되려면 ‘죽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보다 하느님을, 내 욕심보다 그분의 뜻을 ‘우선적’으로 추구함을 뜻합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에서는 멀어질 수 있고, ‘제 밥그릇’ 하나 제대로 못 챙기는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긍정적인 흔적을, 선한 영향력을 남기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바보’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을 사는 존재,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영광의 길’은 실패하거나 상처받더라도 자신이 선택하고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에 성실히 임하는 것입니다. 그 ‘가시밭길’이 고통스럽더라도 끝까지 묵묵히 감내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 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고양’의 길을 걸을 때, 인간은 실패와 절망 속에서도 의연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움과 걱정으로 마음이 산란하신 와중에도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을 택하실 수 있었던 것도 마음속에 의연함을 간직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두렵고 힘든 상황에도 무엇을 믿고 무엇을 감내해야 하는지를 잘 구분해 행동에 옮길 수 있는 결단력을 의미합니다. 편안함과 안락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고통은 두려움과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의연하게 대처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면 내면 깊숙한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도 고통과 번민의 시간 안에서 깊은 ‘하느님 체험’을 하셨기에 그분의 뜻을 따르겠다는 힘든 결정을 내리실 수 있었지요.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하느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하는 존재들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 정의, 평화가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당연히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너무 버거워서 내려놓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우리를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들어 높이는 ‘고양’의 과정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진 내가 불평불만이 아니라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을 때, 힘들고 괴로워도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그분과 더 깊은 일치를 이루는 길을 택할 수 있을 때, 그 십자가는 나를 지켜보는 이들을 하느님께 대한 관심과 믿음으로 이끌어들이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당신과 함께 영원히 누릴, 참된 행복의 삶으로 초대하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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