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생활 속의 성경] 정원 (1)

by 파스칼바이런 2021. 5. 20.

[생활 속의 성경] 정원 (1)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노송동성당)

 

 

의도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생활 속의 성경에서 다루어야 할 집의 장소 중 일곱 번째가 ‘정원’이어서 내가 사는 집 앞에 ‘정원’이 생긴 것이. 아파트 생활이 보통이 되어버린 우리네 주거 환경에서 정원이 생긴 것은 분명 크나큰 축복이다. 그러나 추운 겨울 지나 따뜻한 봄이 되면 어김없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치열하게 드러내는 푸른 빛 생명체들의 등장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은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에겐 축복이기보다 부담에 가깝다.

 

풀을 뽑으려 쭈그려 앉아봐도 언뜻 보기에 똑같아 보여 무엇이 잔디고 무엇이 잔디가 아닌지 구별해 내기가 여간 쉽지 않다. 어쩌면 그렇게도 해와 달의 눈을 피해 몰래 훌쩍 자라버리는지, 이 생명체들을 대하고 있자면 한 정원을 한 번에 한 사람의 힘만으로 가꾸어 내는 것이 턱없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여러 번 더 많은 사람이 호미질하는 수고를 요청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그 어떤 신경도 쓰지 않고 고된 자리에서 벗어나도록 콘크리트라는 딱딱한 소재로 바닥을 말끔하고 시원하게 깔아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들기도 한다.

 

하느님의 정원에서도 이처럼 ‘환영받지 못하는 푸른 빛 생명체’가 있을까? 하느님의 세상 창조 이야기를 묘사하는 성경 첫 부분은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날의 흐름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서서히 당신의 정원을 조성하신다. 너무도 잘 짜여 정돈된 이 이야기 안에는 앞서 언급한 것과 비스름한 생명체들이 들어설 자리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창조의 단계마다 하느님의 엔딩크레딧처럼 등장하는 말이 ‘보시니 좋았다’여서 모두 다 환영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기 다른 날, 각기 다른 존재가 그 정원 안에 다 함께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조화롭게 자리 잡는다.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하느님과 닮은 존재’(창세 1,26.27 참조)인 인간. 정원을 다스린다. 조금 결이 다른 창세기의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의 창조 목적이 인간의 “협력자”(창세 2,18)가 되기 위함임을 말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다양한 모든 피조물이 인간의 협력자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좋으심’ 혹은 ‘선하심’을 드러내는데 돕는다는 뜻이다. 그 어떤 피조물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40항 참조). 인간에 의해 이름 붙여진 존재들은 그들이 지닌 다양성으로 하느님의 선하심을 풍요롭게 표현한다.

 

하느님 정원의 피조물이 자기 창조 목적인 인간의 협력자가 되어야 하는데 만약 그러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때는 피조물 각자가 지닌 하느님의 선하심의 다양성을 드러내지 못할 때이다. 그런데 인간은 정원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임무를 받았으므로 자연스럽고도 아이러니하게 화살의 끝은 인간을 가리킨다. 정원에서 하느님의 다양함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환영받지 못하는 푸른 빛 생명체’는 사실 인간 안 정원의 빈틈에 존재한다.

 

해가 찬란히 빛나고 달이 은은히 빛나는 것처럼 하느님의 피조물은 각자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하느님의 정원인 대자연 ‘안에’ 존재하는 인간 역시 그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일은 고단하다. 축복과 부담 사이에서 그리고 호미질과 콘크리트 사이에서 방황하는 선택의 자유 때문일 것이다.

 

써걱대는 누군가의 예상치 못한 호미질 소리가 들린다. 일단 정원으로 나가 봐야겠다.

 

[2021년 5월 9일 부활 제6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