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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성경 속의 여인들] 입타의 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6.

[성경 속의 여인들] 입타의 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입타는 길앗 사람으로 창녀에게서 났다.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내쳐졌다가 이스라엘이 암몬인들 때문에 힘들어지자 길앗의 원로들에 의해 이스라엘의 장수가 되어 돌아온다. 주님을 믿고 암몬인들과 전쟁을 시작한 입타는 승리하게 된다. 입타의 딸이 등장하는 건 입타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독한 비극의 시작이었다.

 

입타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갈 때, 처음으로 마중나오는 제 집안의 사람을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치기로 약속했었다(판관 11,31). 승리에 대한 확신이,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믿음의 이러한 표현이 현대적 감각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다. 딸의 태도 역시 이해하기 마뜩잖다. 아버지 입타가 맹세한 것을 제 입으로 그대로 읊는다. 그리고 아버지 뜻대로 하라고 부추긴다.

 

입타는 자신의 맹세를 전쟁 전에 공개적으로 내뱉었다. 입타의 딸은 그 맹세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제일 먼저 집을 나서 아버지를 맞이한 입타의 딸은 집안의 이름 모를 다른 사람을 대신해 스스로 아버지의 맹세에 자신을 내어맡긴 셈이다. 우연한 비극이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자 작정했던 입타의 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남성 위주의 사회였고, 집안의 가장은 제 식솔들을 제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재산의 일부로 생각했다는, 납득하기 힘든 사회상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는 없다. 더욱이 이 지점에서 하느님께 대한 맹세를 지켜야만 한다는 입타와 그의 딸의 너무나 순수한 믿음을 굳이 끄집어내어 한 여인의 희생에 둔감해지는 무서운 해석을 되뇌는 건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일테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 나름의 생리와 그로 인한 부조리는 그 자체로 간직하는 것이니. 다만 우리가 짚어볼 것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딸의 희생과 전쟁의 승리로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가 공존하는 이 사회에 대한 우리의 성찰이다.

 

입타는 제 옷을 찢으며 울부짖었다(판관 11,35). 입타의 비통함은 저 스스로 맹세한 것에 대한 무력함과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 사이에 갈라진 틈을 정확히 겨눈다. 입타의 딸 역시 그러했다. 아버지의 맹세대로 따르긴 하되, 두달의 시간 동안 제 처지에 대한 울부짖음을 청했고, 떠나가 울었고, 돌아와 죽었다.

 

입타의 딸은 제 목숨을 걸고 아버지의 승리를 받아들인 셈이다. 여기엔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인간의 무모함이 중첩되어 있다. 입타의 딸이 죽어간 것은 한 민족이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남성 위주’의 사회가 지닌 폭력적 부조리에 대한 고발이 아닌가 싶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내어 맡기는 일이 깊어지고 진지해질수록 우린 제 자신의 신앙이 절대적 맹신으로 타락한다는 위험을 깨닫게 된다. 그 맹신이 사회적 권력까지 얻어 누릴 때, 사회적 계급 투쟁에서 밀려난 약자들의 고통은 그 맹신의 자연적 귀결일 것이다. 그런 어처구니 없음에 하느님은 입타의 이야기처럼 침묵으로만 등장하신다.

 

오늘도 우리는 또 다른 ‘입타의 딸’의 희생을 내버려둔 채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며 헛된 맹세를 수도 없이 되뇌는 건 아닌지, 하느님의 침묵을 배워야 하는 건 아닌지….

 

[2021년 9월 5일 연중 제23주일 대구주보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