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믿습니다, 믿어요, 그냥… - 요한복음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자주 내뱉는 말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저런 인간에게 형제요, 자매라 말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용기있는 사람들”이라고. 이 말엔 나 자신에 대한 한계와 부족함에 대한 처절한 고백이 날것 그대로 새겨져 있고, 이웃과 세상을 향해 용서를 갈구하는 비루한 나 자신의 한탄이 깊이 깔려 있다. 요한복음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그럼에도 너는 내 형제요, 자매’라는 애달픈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는”(요한 3,16) 하느님은 예수님으로 육화하셔서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시려고”(요한 13,1) 십자가를 지셨다. 요한복음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사랑의 복음’일 것이다. 오늘날 제 욕망의 배설로 타락해 버린 ‘사랑’이 아니라 죽이려 덤벼드는 이들마저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름답게 품어 안는 것이 요한복음일 것이다. 그러니까 폭력이나 질투, 그리고 단절의 편협함 따위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파괴하거나 짓밟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결기가 요한복음 안엔 가득하다.
하느님께서 ‘살덩이’가 되셨다는 사실은 현실 논리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니코데모의 입장이 그러했다. 하늘로부터 오긴 한 것 같은데,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왔을까, 예수를 찾아 묻는다. 예수는 ‘위로부터의 태어남’을 언급한다. 땅은 그렇다. 땅은 어둠이고 닫혀있으며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빛이 어둠 속에 왔다는 사실은 기쁘거나 복되거나 설렌 일이 아니었다. 낯설고 불편했으며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요한복음의 독법은 이제 기어이 우리의 삶을 꿰뚫고 찾아 온 빛에 대한 태도를 읽어내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니코데모를 예수의 주검 앞에서, 인간 예수의 매력, 딱 거기까지만 등장시킨다. 인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나타나엘이 그랬고,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으며, 제 살덩이를 먹으라는 예수 곁에 그럼에도 머물러 있던 제자들이 그랬다. 이를테면 인간 이성 너머의 신비에 도달하는 것, 그 낯선 것에 대한 수용은 인간적 이성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해방과 자유를 향한 무모한 도전인 셈이다. 이성과 의지는 익숙해진 삶의 틀 안에 매번 갇혀서 작동한다는 경험칙을 우리는 안다. 예컨대 사마리아 여인이 긷는 물은 야곱의 우물의 것이어야 했고, 그녀가 예배드리는 곳은 가리짐이어야 한다는 당위는 그녀의 사고와 의지를 묶어놓은 감옥과 같았다. 예수는 그런 그녀를 해방시키고 싶었다. 살아 움직이는 물, 그것은 존경해마지 않는 조상 야곱이 마련한 우물이 아니라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는 것이라고. 너무나 익숙해서 평범하게 된 우물에 더 이상 올 필요가 없다는 것.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예수를 통해서도 사마리아 여인은 묻어 놓았던 과거를 들추어내어 낯선 남정네 앞에 쏟아버리는 자유를 만끽했을 터이다. 급기야 가장 중요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 굳이 여기네, 저기네 하며 공간적 유폐 속에 살아가는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는 ‘자유롭게(영과 진리 안에서)’ 풀어 놓는다. 기존의 사고와 생활 방식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곳에 여인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한다.
‘예수’라는 역사의 한 인물을 두고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일이 너무나 당연하여 진부한 것이 되어 버린 신앙인에겐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그리 흥미롭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동안 읽혀진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서 찾아나서는 ‘믿음’의 가치를 확연히 드러낸다. 믿음은 추종해야 할, 수련해야 할, 그래서 획득해야 할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믿음은 기존 가치 체계에서의 해방이며 자유이고, 그리하여 초월적 특성을 지닌다. 믿음의 끝에 예수가 있고 그런 예수를 요한복음은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할 진리라고 선포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과연 진리는 무엇인가? 빌라도가 예수에게 묻는 그 질문,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진다면 우린 자유롭지 못하리라. 답에 얽매여 진리는 더 이상 사유되는 것이 아닌 채로 묻어 둘 수밖에 없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사는 삶에 균열을 낸다. 균열의 빈틈을 찾아 나선 이에게 요한복음은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일 테지만 그렇지 못한 이에게 요한복음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유다 사회는 예수를 폭동 주범자로 여겼고, 예수의 제자 유다마저도 예수를 없애야 할 죄인으로 여기게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화려하거나 깊은 지식의 언어로 장식되는 게 아니다. 저마다 하느님을 잘 안다고, 세상 이치의 계산에 밝다고 하는 이들이 죄다 예수를 거부하고 제거하고자 난리였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너무나 단순한 말마디 하나면 된다. “아멘”, 이 한마디. 예수가 입을 뗄 때마다 반복해서 되뇌었던 ‘진실로, 진실로’라는 이 말 한마디가 우리 입을 통해 드러나기만 하면 된다. 진리는 단순하여 자유롭다.
예수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가르친다. 믿음의 완성은 사랑이다. 초월의 끝에는 무엇하나 걸릴 것 없는 자유로운 사랑이 숨통을 튼다. 답을 얻기 전까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모를 일이 사랑이다. 나는 사랑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통해 사랑한다고 여긴 것이 실은 제 욕심의 투사였음을 고백할 때가 많다. 예수의 사랑은 예수의 의도에 맞갖는, 그리하여 육화한 하느님의 정체성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 이를 향한 선택적 사랑이 아니었다. 그를 향해 비난과 조소, 심지어 죽음의 광기까지 내 비친 세상과 그 세상에 부역하는 비겁한 이들을 향한 끝없는 초월이 예수의 사랑이었다. 궁극에는 ‘사랑하자.’라는 말조차 의미없는, 어떠한 미움과 반감도 존재치 않는, 사랑하고픈 의지 자체로부터도 자유로운 그런 사랑이었다. 우린 그런 사랑을 믿음이라고도 한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행복하다.”라고 말한 예수를 진정으로 믿고 사랑한 이는 여태껏 불신자로 이해되어 왔던 토마스였다. 토마스만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예수를 고백한다. 죽은 자가 다시 돌아온다고 해서, 제 인생과 제 가치관을 송두리채 던져버리고 다시 살아온 이가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인간이되 당신은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랑하면 뭐든 믿는다. 죽었던 예수를, 그의 살덩이라도 확인하고자 했던 토마스의 사랑은 불신이 아니라 예수를 하느님으로 고백하게 하는 진정한 믿음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요한복음을 읽고 또 읽는다. 무턱대고 읽는다. 사랑하기 위해, 도대체 믿기 힘든 것을 제대로 믿기 위해.
[월간빛, 2021년 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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