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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타마르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13.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타마르(창세 38; 마태 1,3)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가부장제 사회였던 고대 이스라엘의 족보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혈통을 기록하는데, 유독 예수님의 족보(마태 1장)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시아버지에게서 자식을 낳은 타마르, 가나안 창녀 라합, 모압 여인 룻, 다윗과 간통한 밧 세바, 그리고 성모님이지요. 특히 성모님 이전의 네 여인은 이방인이거나 부적절한 과정을 거쳐 자식을 가진 이들인데요, 마태오는 이를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술함으로써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을 드러내고, 나약한 인간 본성을 받아들여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섭리를 부각시킵니다.

 

예수님의 족보 맨 처음에 등장하는 여인 타마르는 가나안 사람으로,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타마르라는 이름은 야자나무를 뜻하는데, 하늘을 향해 무려 30미터까지 곧게 자라는 야자나무는 전통적으로 의인을 상징하며(시편 92,13)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식물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야자나무/종려나무(그리스어 포이닉스 φοῖνιξ)는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할 때(요한 12,13) 그리고 천상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앞에서(묵시 7,9) 손에 든 ‘환호와 찬양’의 나뭇가지이기도 하지요. 이런 의미에서 타마르는 그 이름부터가 예수님의 조상으로 참 적절해 보입니다만, 실제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원래 유다의 맏아들인 에르와 혼인했던 타마르는 남편이 죽자 고인의 형제와 혼인하여 대를 잇는 수숙혼(嫂叔婚: 신명 25,5-10 참조) 전통에 따라 둘째인 오난과 혼인했지만, 그 역시 죽는 바람에 시아버지 유다에게서 버림받고 친정으로 쫓겨났지요. 이스라엘에서 남편이나 장성한 아들 같은 법적 경제적 보호자가 없는 과부는 고아나 이방인과 함께 사회의 절대적 빈곤 계층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타마르가 창녀로 위장한 채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그의 아이를 가지고 유다 가문의 어머니가 되었던 일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창세 38장 참조).

 

유다와 타마르의 이야기에는 죽음과 비탄, 욕망과 속임수로 얼룩진 인간 군상의 민낯이 담겨 있는데요, 창세기 저자의 시대든 오늘날이든 윤리적 기준으로만 보자면 그다지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닐 터입니다. 성경 저자는 도대체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일까요? 성조 유다가 제멋대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 동족이 아닌 이방인 여성과 결혼하고(38,1-2) 두 아들의 죽음을 그다지 애통해하지도 않으며(38,6-10) 심지어 자기 자식을 잉태한 타마르를 죽이려 함으로써(38,24) 아브라함의 계보를 이어가는 데 소홀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방인 여인 타마르는 유다의 자손을 낳기를 간절히 열망했고 그렇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손의 약속과 구원 경륜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타마르는 유다의 아들 페레츠를 낳음으로써 다윗의 족보에(룻 4,18-22)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에 영예롭게 들어가게 되었지요(마태 1,3). 물론,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를 속이고 동생 요셉을 팔아넘겼던 유다가(창세 37장) 타마르의 기지와 열망 덕에 “그 애가 나보다 더 옳다!”(38,26) 하며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성조로 새롭게 태어났고, 이후 요셉 일화에서 야곱 가문의 화합과 일치를 가져오는 주인공으로 변모할 수 있었음도(43,8-14; 44,18-34) 간과할 수 없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유다 가문의 여인이길 열망했던 타마르를 당신의 구원 경륜 안으로 기꺼이 맞아들이신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합니다. 극복하기 힘든 현실 속에서 불평과 좌절만 하기보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길 지치지 않고 그분의 구원 경륜 속에 나를 온전히 던지는 복된 일상을 이어가는 우리가 되길 희망합니다.

 

[2021년 10월 31일 연중 제31주일 대구주보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