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그리스도왕 대축일 -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느님 나라'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1.11.21 발행 [1638호]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대신학교 정문에서 교정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이라는 글이 널찍한 바위에 큰 글씨로 새겨져 있습니다. ‘힘없고 약한 자를 돌보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며 사회정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제’,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제’, ‘가까운 친척이나 친한 교우에게만 매여 그 사람 말만 듣고 움직이지 않는 사제’ 이런 사제를 본당신부로 둔 신자들은 행복하시겠지요. 글에서 ‘사제’라는 말을 ‘대통령’이라는 말로 바꿔도 내용이 잘 어울립니다. 사람들이 지도자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부분은 비슷하다는 뜻일 겁니다.
오늘 복음은 백성들을 이끄는 지도자, ‘임금’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기대하는 임금의 모습과 예수님께서 지향하시는 임금의 모습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기대하는 임금의 모습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백성들을 이끌어 원하는 목표를 성취해내는 정치적 지도자입니다. 이런 임금은 사람들을 힘으로 복종시키려 합니다. 사람들의 복종과 희생을 통해 자기 ‘왕국’을 세우려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낮은 자리에서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고자 하십니다.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쉬운 길을 택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희생하시는 어려운 길을 택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충성을 강요하지 않고 사랑과 신뢰로 그들의 마음을 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말하는 ‘임금’보다 ‘친구’가 되기를 바라신 것이지요.
그렇기에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라고 묻는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를 직역하면 “내 왕국은 이 세상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억지로 ‘왕 자리’에 앉히려 했던 유다인들은 그분을 통해 힘과 재물 같은 세속적인 이익들을 얻으려 했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고자 하신 것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선적으로 추구하신 것은 힘과 능력으로 싸워 이겨 쟁취하는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이런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이 바라는 ‘임금’이 되어주실 마음이 예수님께 없음을 깨닫자, 실망감과 분노에 사로잡혀서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과 시련, 죽음의 위험에도 당신의 뜻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세속적 이익을 얻는 게 아니라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기쁜 소식’은 그들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리라는 ‘정치적 가능성’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신다는 ‘구원의 진리’임을 굳게 믿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큰 사랑으로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십니다. 그것이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유일한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예수님을 이 세상의 왕으로 세우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잘 보여서 세상에서 한 몫 챙겨보겠다는 심산도 아닙니다. 당장 힘들고 괴롭더라도, 지금은 손해 보는 거 같아 억울하더라도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름으로써 그분을 우리의 ‘왕’으로 섬기겠다고 다짐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주님을 ‘왕’으로 섬기며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분께 사랑받는 백성으로 기쁘게 살 수 있다는 진리를 마음에 새기기 위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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