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기쁨의 훈련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가톨릭신문 2021-12-12 [제3273호, 15면]
주님 사랑으로 보호받는 신앙인 그분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어 타인과 너그러운 관계를 맺으면서 기도로 하느님의 평화를 체험하길
“기쁨은 미덕이자 훈련입니다.”(미로슬바브 볼프) 성경 신학의 여러 주제 가운데 오늘날 새롭게 부각되는 주제는 ‘기쁨’입니다. 미로슬라브 볼프 교수는 예일대 신학부의 ‘기쁨의 신학과 좋은 삶’이라는 주제를 연구하는 책임자인데 인터뷰에서 기쁨이 왜 좋은 삶에 필요하고 오늘날 왜 기쁨의 신학이 필요한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기쁨은 사라지고 걱정으로 움츠러드는 상황에서 대림 제3주일과 자선 주일을 맞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주제인 ‘기쁨’은 우리와 하느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면서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다시 찾아 살아내도록 우리를 일으킵니다.
복음의 맥락 루카복음 3장 10-18절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요한 세례자가 요구하는 회개의 표지들을 소개합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요한은 자신처럼 은둔자가 되라거나 광야로 들어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삶의 자리, 일상생활에서 삶의 형태를 바꾸라고 권고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공감만 하지 말고 실제로 가진 것을 나누고 절제하며, 착취를 피하라고 권고합니다.
요한은 나아가 사람들에게 오실 메시아인 예수님을 가리키며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 심판하러 오실 분”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의 물 세례가 아니라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보다 20여 년 후 바오로는 로마 감옥에서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무엇을 하라기보다 존재의 근본이 되는 자세, 곧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라”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에게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기쁨의 근원 제1독서인 스바니야서에서 스바니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3,17) 이스라엘, 시온을 대상으로 한 신탁이지만 이런 표현은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생의 투쟁 한 가운데에서 우리와 함께 싸우고 사랑으로 우리를 쇄신시키는 분입니다. 의무나 계명을 강요하거나 우리가 가진 것이나 능력을 보고 평가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이 웃는다거나 기뻐한다는 표현은 성경에 드물게 나오는데 하느님은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걸어갈 때 그런 ‘나 때문에’ 기뻐서 환호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있는 거룩하고 위대한 존재”(화답송)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하느님 자녀들입니다.
기쁨의 생태계 바오로는 제2독서인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기뻐하라고 하는데 스바니야와는 동기가 다릅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보통 “누구와 함께 기뻐하다”라고 말하지 “누구 안에서 기뻐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바로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말하는데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과는 다른 차원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어떤 다른 존재, 곧 주님과의 일치를 사는 한도 안에서 참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기쁨은 오로지 주 예수님과의 관계, 친교의 체험에 의해서만 탄생할 것입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은 “너그러움을 보이라”는 명령으로 발전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움을 보입니다. ‘너그러움’은 믿는 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주님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체험하는 방식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항상 기뻐하지만 반대로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무례하고 오만하며 잔인한 사람들이 늘 있는 법입니다.
‘너그러움’은 폭력이나 무관용과 반대되는 지혜롭고 균형 잡힌 자세를 뜻합니다. 그런 자세는 위에서 오는 지혜와 은총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너그러움’은 공동체 지도자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덕목입니다. 주님이 구세주로 하늘에서 오시어 공정하게 심판하리라는 기대와 신뢰를 가진 사람은 힘들고 적대적인 환경에서 온갖 환난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모든 사람과 너그러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필리 4,6)라는 명령형은 독자들에게 그들이 습관적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을 멈추어야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오로는 어떤 것에 예외를 두지 않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오로는 걱정으로 가는 과정을 단절하기 위해 기도에 집중하라고 권고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필리 4,6)는 기도 안에서 지녀야할 올바른 자세와 전망을 제공합니다.
바오로 자신도 감사 기도가 그의 기도 습관이었습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에게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 그분에게 우리를 돌보아달라고 내어맡기는 것, 우리 근심이 그분 것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꾸로 감사의 부재는 우상숭배로 이끌고 현재나 미래에 힘든 일에 대해 불평하게 됩니다.
바오로가 투덜거리지 말고 모든 것을 하라고 한 명령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간구’, ‘여러분의 소원’같은 기도 용어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라는 말과 나란히 나오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 기도에서 감사가 모든 기도의 뿌리임을 알려줍니다. 바오로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가르친 후에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평화를 체험할 것임을 약속합니다. 기도의 열매는 평화입니다. 평화는 우애와 연대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낳습니다.
성찰 코로나19로 여러 종류의 비관주의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다보면 어떤 종류의 포기, 체념, 슬픔, 고난, 상처를 겪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자신, 인생, 공동체, 사회와 교회 전체에 대한 비관주의로 이어져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내부와 외부에 우울하고 고립된 비관주의자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돌보고 연대하면 좋겠습니다.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 말씀대로 “연대라는 말은 세속적인 정신을 멸시하는 말”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기쁨을 가져오는 언어입니다. 하느님도 인간과 연대하기 위해 세상에 가난하고 낮은 모습으로 아기 예수님을 보내고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기쁨은 힘, 사랑, 기도, 평화입니다. 기쁨만이 영혼을 낚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주는 사람을 기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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