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여인들] 한나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은총(기쁨)’이란 뜻을 지닌 이름 한나, 기쁠 일도 복된 일도 없이 슬픔에 젖은 모습으로 성경 안에 등장하는 여인. 그에게서 사무엘이 태어났고, 사무엘로부터 이스라엘에는 하느님께서 뽑아 세운 임금의 시대가 열린다.
한나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하느님께서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남편의 또 다른 아내 프닌나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1사무 1,5-6). 한나의 남편 엘카나는 실로에서의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한나를 다그친다. “한나,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도 않고 그렇게 슬퍼만 하오? 당신에게는 내가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1사무 1,8)” 언뜻 보기에 아내에 대한 남편의 걱정과 애정을 엿볼 수 있을 듯 하나, 그 방식이 날카롭고 독하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인의 아픔을 다시 한번 후벼파기 때문이다. ‘아들보다 내가 더 낫지 않나’라는 말은 ‘아들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엘카나에겐 이제 당연시 여겨졌고, 그 당연함으로 괴로운 것이 또한 당연한 것이 되었고, 그리하여 한나에게 슬픔은 운명이어야 한다는 억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나는 억압의 일상을 거부한다. 주님께 간청한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아들을 달라고, 그 아들을 주님께 바치겠노라 다짐하며 간청한다(1사무 1,11). 한나의 청원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의 것과 그 이스라엘 안에서 억압받던 여인들의 그것들과 많이 닮았다. 한나의 청원은 고통받는 이들이 마지막 기댈 수 있는 자리를 하느님의 자리로 각인시킨다. 한나의 하느님은 ‘만군의 주님’이시다. 구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만군의 주님’이란 호칭은, 그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고통 속 여인만이 부를 수 있는 유일한 호칭인 것이다. 고통 속에 고통을 아는 자에게만 하느님은 만군을 호령하시는 절대적인 권능을 지닌 분이 되신다. 아니, 그러셔야만 한다!
기도하는 한나는 입술만 겨우 달싹거린다(1사무 1,13). 술에 취한 듯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한나를 실로의 사제 엘리는 꾸짖는다. 나는 여기서 사회의 관습과 당위가 또 한 번 한 여인을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고 있음을 목도한다. 당시의 기도는 크고 높은 목소리로 울려 퍼져야 했다(시편 3,5;4,2;6,9; 다니 6,10-11 참조). 하느님을 찾는 이에게 인간의 방식과 태도를 문제 삼는 건, 고통을 겪는 이에게 ‘이젠 슬퍼하지 마세요’, ‘모든 게 잘 될 거에요’, ‘이 또한 지나갈 거에요.’라는 방관자의 태도만큼이나 모질다.
한나의 청원은 당연시 여겨졌던 이 세상의 인식과 관습을 무색게 한다. 사무엘의 탄생으로 답을 얻은 한나는 그녀의 다짐대로 사무엘을 성전에 봉헌한다(1사무 1,27-28). 그리고 곧장 들려지는 한나의 노래. “제 마음이 주님 안에서 기뻐 뛰고 제 이마가 주님 안에서 높이 들립니다(1사무 2,1).” 그 기쁨의 이유는 오직 하나다.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1사무 2,2).” 어설픈 위로와 핏기 없이 메마른 사회적 관습을 이겨낸 한나의 기쁨은 오직 하느님을 향해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기쁨 역시 그러했다(루카 1,46-55). 고통을 아는 만큼 하느님을 알게 된다. 슬픔을 겪는 만큼 기쁨을 노래한다.
[2021년 11월 28일 대림 제1주일 대구주보 4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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