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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라합(여호 2; 6,17. 22-25)

by 파스칼바이런 2021. 12. 24.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라합(여호 2; 6,17. 22-25)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예수님의 조상 라합은 가나안 땅 예리코에 살던 이방인 여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예리코 성읍에 정탐꾼들을 보냈는데, 라합은 궁지에 몰린 그들을 안전하게 숨겨 목숨을 구해주었고(여호 2장), 그 공로로 이스라엘 백성 안에 받아들여졌지요(6,17.22-25). 그렇게 라합은 유다의 7대손인 살몬의 아내가 되었고, 마침내 다윗의 증조부인 보아즈(룻 2-4장 참조)를 낳아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마태 1,5).

 

예리코의 창녀였던 라합의 집은 성읍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성벽 담에 붙어 있었는데(여호 2,15), 이는 그녀가 직업상 동족들에게 천대를 받았고 성읍을 거쳐 가는 아무라도 맞아들여야 하는 고된 ‘변두리 인생’을 살았음을 말해줍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자매와 친지들이 있었음에도(6,23) 창녀로 살아야 했다는 건, 가족들의 보살핌조차 받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그래서일까요,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만났을 때 “나는 주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 주 당신들의 하느님만이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십니다.”(2,9-11) 하며 하느님께 희망을 걸었던 그녀의 고백은 더욱 간절해 보입니다. 과연 라합( : ‘활짝 열다, 넓히다’)이란 이름 그대로, 그녀는 나락에 떨어진 삶 속에서도 뭇 남정네들이 전해준 하느님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있었고 그분의 보호 아래 의탁하려는 마음 또한 열었던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의 탈출을 도우면서, 이스라엘이 예리코를 정복해 들어올 때 자신과 온 가문의 목숨을 살려달라며 그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창문에 매달기로 약속한 진홍색 줄은 그 신표(信標)였지요. 이 진홍색 줄은 이집트 탈출 때 죽음의 천사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만은 치지 않고 지나갔던 파스카 사건을 연상시키는데요, 초대 교회 교부들(오리게네스, 예로니모, 암브로시오)은 이 진홍색 줄을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예형으로, 즉 구원의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이방인 창녀’ 라합은 죄와 죽음에서 구원된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예형(‘순결한 창녀’)이 되었고, 특히 신약성경 서간들은 라합을 “믿음으로써 순종하여 구원된 의인”(히브 11,31), “실천으로 의롭게 된 신앙의 모범”(야고 2,25)으로 소개합니다.

 

가나안 땅의 가장 큰 성읍 예리코에 살던 그 누구보다 밝은 혜안과 넓은 가슴을 지녔던 여인 라합, 자신을 지켜주지도 지원해 주지도 못했던 가족과 친지들 모두를 살리고자 간절히 비는 그녀의 모습에선(여호 2,12-13) 구원자의 면모마저 엿보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였고 환난이 닥칠 때 가족 모두 집 안에 모아들이겠다는 계약의 조건을 지킴으로써 그들을 살린 라합의 이야기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그 주민들을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완전 봉헌’(Herem) 규정마저 초월하는 위대한 ‘구원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조상 라합과 함께 우리도 일상의 창에 믿음의 진홍색 줄을 드리우고, 사랑하는 가족들 모두를 하느님의 길 안에 머물도록 지켜내어 모두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이 시대의 ‘라합’으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2021년 12월 5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대구주보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