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성탄 구유 앞에서 제1독서(이사 52,7-10) 제 2독서(히브 1,1-6) 복음(요한 1,1-18) 가톨릭신문 2021-12-25 [제3275호, 16면]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이 우리를 향한 구원 의지 보여주신 것 육화강생이라는 은혜로운 신비 묵상하며 겸손한 삶 살아가야 주님 은총으로 가득 채워 세상과 가난한 이웃 향해 나아가길
한적한 어촌 마을 작은 언덕 위, 아담한 저희 공동체 경당 안에 꾸며진 성탄 구유 앞에서 한참을 앉아있었습니다. 우주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인 한 인간의 팔에 안겨있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습니다.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이신 하느님께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포대기 위에 누워계신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틈만 나면 올라가려고 기를 쓰는 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애쓰지 말고 내려서거라.” 어떻게 해서라도 커지려고 발버둥 치는 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커져 봐야 느는 건 스트레스뿐이니 어떻게든 작아지거라.” 무엇이든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으려는 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무거우니 이제 그만 내려놓거라.”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의 품에 고이 안겨 계신다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 의해 양육되셨다는 것,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순종하셨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자기 낮춤의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타오르던 하느님께서 아무리 그 사랑을 외쳐봐도 소용이 없었기에, 드디어 극단적 처방, 초비상 수단을 선택하신 마지막 수단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 14) 놀랍게도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한 연약한 인간 존재로 태어나셨습니다. 영원하신 분이 인간의 시간에 자청해서 얽매이셨습니다. 훨훨 날아다니며 시공을 초월하실 분이 인간 세상이라는 협소한 공간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귀에 대고 아무리 크게 외쳐봐도 알아듣지 못했기에, 참으로 무지몽매한 우리 인간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깨달음을 주시려고 극적인 변신을 꾀하신 육화 사건이 바로 성탄이 아닐까요?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요 과분한 은총인지 모르겠습니다.
구약의 그 어떤 위대한 인물들도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 사람은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조차도 그분 얼굴 뵙기를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당신 얼굴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명명백백히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구원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뚜렷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오늘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통해서 말입니다.
놀라운 육화강생의 신비를 깊이 묵상합시다! 참으로 경이롭고 은혜로운 육화 강생의 신비입니다. 성탄 시기 내내 왜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는지 묵상하고 또 묵상할 일입니다.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예화는 제게 성탄의 신비에 대한 큰 깨우침을 선물했습니다.
한 금슬 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큰 사고를 당해 한쪽 눈을 잃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해도 왜 계속 그렇게 슬퍼하오?”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여보, 내가 슬퍼하는 것은 눈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당신이 나를 덜 사랑할 것 같기 때문이랍니다.” 남편이 정말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그리고는 잠시 외출을 나간 남편이 몇 시간 뒤에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모습을 본 아내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눈 하나를 뽑아버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나도 당신과 같이 되었소. 나도 이제 외눈이라오.”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애틋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예화입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 그냥 그 자리에 계셔도 아무 문제없는 하느님께서, 굳이 당신을 극도로 낮추셔서 인간이 되신 이유는, 우리 인간이 너무나 측은하고 가련해서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와 나란히 키를 맞추고 눈을 맞춘 상태에서 우리와 편안하게 대화하시려고 육화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당신 손수 닦아주시려고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육화강생의 놀랍고 은혜로운 신비를 묵상하는 성탄 시기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분명합니다. 우리도 한없이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을 따라 자세를 낮추는 것입니다. 뻣뻣한 목에 힘을 빼는 일입니다. 남 위에 서려 하지 말고 밑으로 내려서는 일입니다.
충만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 16) ‘충만(充滿)함’이란 표현이 제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본성 중에 우세한 측면이 충만함입니다. 충만함이란? 풍성함, 넉넉함, 완전함, 너그러움…. 참 다양한 함의(含意)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얼마나 빈약하고 비천한지요?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한지요? 이런 우리의 불완전함을 메꿔주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언제나 부족해서 허덕이는 우리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히, 완전하고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서 풍요로우신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시켜야겠습니다. 백만 볼트 에너지로 가득 충전시킨 후에, 세상과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야겠습니다.
가끔 완전히 방전된 배터리 상태의 내 영혼을 확인하곤 합니다. 내 한 몸 서 있기에도 벅찬 순간에는 영적 생활이고 이웃사랑의 실천이고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틈만 나면 충만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방전된 우리의 플러그를 초강력 에너지원이신 하느님이란 전원에 연결시켜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 생활이요 영적 생활입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충전 상태를 확인하듯이, 매일 우리의 영적 충전 상태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충전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바라보듯이, 매일 영적 충전을 위해 그분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충만 그 자체이신 하느님, 부유하고 풍성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충만함을 빈약한 우리를 위해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사용하시는, 아니 남김없이 모두 써 버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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