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주님 성탄 대축일 - 지극한 사랑으로 오신 주님! 기뻐하여라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1.12.25 발행 [1643호]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프랑스 북부의 한 거점에서 독일군과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서로 1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피 말리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차가운 전장에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채 성탄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먼저 연합군 진영에서 백파이프로 캐럴을 연주하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그러자 독일군은 그 음악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릅니다. 각자의 진영에서 성탄을 기념하던 그 마음이 서로에게 전해져 ‘공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소통의 자리를 마련한 그들은 이 기쁜 날, 단 하루만이라도 이 참혹한 전쟁을 멈추자며 일시적인 ‘휴전협정’을 맺습니다. 한목소리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함께 모여 성탄을 보냅니다. 그렇게 짧은 휴전이 끝나고 자기 진영으로 돌아간 군인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총을 겨눌 수 없었습니다. 같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을 함께 기뻐한 그들은 이미 적이 아닌 친구, 형제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 유명한 이 ‘크리스마스 정전’ 이야기는 신앙이 내 삶에 어떤 의미인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신앙은 복을 받기 위한 ‘처세’도 아니고, 죽음 이후를 대비한 ‘보험’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 삶 안에 들어오셨다는 데에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기쁨을 통해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제자로 변화하지 못한다면, 그런 신앙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 희망의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고통과 시련, 슬픔과 두려움의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실체도, 존재도 없는 어둠은 빛이 우리를 비추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입니다. 일 년 가운데 밤이 가장 긴 이 시기에 주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밝게 빛남을 기억하며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함인 것이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의 빛, 사랑의 빛을 비춰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금세 흘러가버릴 물이 아니라,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당신의 의지를 곧 현실로 만드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말씀’께서 우리와 똑같은 존재가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은 본래 ‘육신’ 즉, 물질적인 ‘몸’을 가리킵니다. 그 누구보다 강한 존재이신 분께서 굳이 물리적인 한계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사람이 지닌 약함과 부족함까지 고스란히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세상과 동떨어진 ‘구경꾼’으로 남지 않고, ‘방관자’로 계시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우리네 고된 삶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더 직접적으로 사랑하고, 더 잘 이해하며, 더 깊이 공감하시기 위해 기꺼이 당신 자신을 내려놓고 낮아지십니다.
그런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은 직역하면 ‘천막을 치고 함께 거주하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은 우리와 같은 시공간에 있으면서도 ‘딴 세상’을 사는 부자나 권력자들처럼 되지 않으시고, 가장 ‘일반적’이고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같은 처지’로 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 높고 화려하며 안락한 자리에는 주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 필요할 때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겪는 슬픔과 괴로움을 함께 겪으시면서 “잘하고 있다”고 격려하시며 함께 걸으십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형제자매들 안에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실천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또다시 태어나시고 현존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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