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독특한 하느님의 사랑법에 놀라지 맙시다! 가톨릭신문 2022-01-09 [제3277호, 19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고 하느님의 일을 시작하신 예수님 크나큰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 자녀로서 힘찬 삶 살아가길
교회는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실을 전하며 성탄 시기를 마감합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복음은 주님의 공생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들려줄 텐데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인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비로소 아버지의 일을 착수하셨다는 사실에, 새삼 사제의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누군가에게 세례를 베푸는 사명의 막중함에 마음을 여미게 됩니다. 원죄에 물든 영혼을 ‘태초’의 순수로 다시 빚으시는 하늘의 작업에 동참하게 해주신 은혜를 깊이 새겨봅니다.
종종 여행길에서 사람의 손이 채 닿지 않은 듯한 자연을 만나면 우리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히게 되는데요. 태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후미진 곳을 섬세히 매만지고 계신 하느님의 손길이 보이는 듯하여,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말씀이 그러하다 싶은데요.
어느 날, 어느 순간, 하늘이 열리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온다면 과연 우리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해봅니다. 아마도 저는 거의 까무러칠 만큼 놀라서 허둥댈 것만 같은데요. 매일 매 순간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 사랑에 잠겨 지낸다면서도, “오소서, 성령이여!” 매일매일 기도드리면서도 그런 못난 모습을 보일 것만 같으니, 낯이 화끈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베드로 사도가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라고 뒤늦은 고백을 드리는 모습에서 위로를 느낍니다. 삼 년여, 주님의 공생활에 함께했던 베드로가, 주님의 수제자로 인정을 받았던 사도 베드로가 이제서야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을 보면서 뜨거운 동료애를 느낍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자란 베드로의 고백마저 기특해하고 계신 것이 분명해 보여서 그렇습니다. 제발 이제부터는 헤아리기 힘든 주님의 자비 앞에, 진정 크신 하느님의 사랑에 놀라서 혼비백산하지 않고 베드로 사도처럼 담담히 감사기도를 올릴 수 있는 배포를 청해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지를 이미 깨달은 존재이니까요. 그럼에도 그분의 사랑에 놀라기만 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 예의가 아니라 싶으니까요. 이야말로 아직도 그분의 용서가 내 죄보다 작을 것이란 ‘징벌의 공식’에 사로잡힌 상태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직도 그분의 크심과 사랑이 많으심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결과로 비친다면 진정 두렵고 죄송할 테니 말입니다.
때문에 저는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토록 엄청난 은혜의 날을 무심히 넘기지 않으시길 기도드립니다. 으레 미사참례를 하고 성체를 영했으니 믿음인의 할 바를 다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파올로 베로네제 ‘그리스도의 세례’(1580~1588년).
우리는 늘 그분과의 만남을 희망합니다. 이 희망은 믿음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희망은 믿음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생성되는 신비의 지혜입니다. 지혜는 우리를 놀랍고 크신 하느님, 좋고도 좋은 주님의 방법에 오로지 긍정하여 의탁하는 믿음의 원동력입니다. 때문에 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교리 지식이 필요치 않습니다. 모든 이를 솔깃하게 하는 달변이 요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깊고 심오한 진리를 깨달아야만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하고 주님 사랑을 전하기가 쑥스러워서 주저하고 망설이는 분들께 마리아 사제 운동을 시작했던 곱비 신부님의 증언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신부님은 이 큰 사업을 모자란 자신에게 맡겨주신 이유가 도대체 이해되지 않아서 오래, 성모님께 기도하셨답니다. 드디어 1973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답을 해주셨다는데요. “아들아, 가장 부족한 도구라는 이유로 너를 택했다. 그래야 이 일을 네 일이라고 말할 사람이 없지 않겠느냐? 마리아 사제 운동은 오로지 나의 사업이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허약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서 당신의 강함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만큼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이나 재주가 뛰어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처지를 분명히 인식하는 믿음의 기본 지혜를 소중해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나날이 키워나가는 열정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믿음의 핵심이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주님께서는 참이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화답을 듣고 싶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아직 설익은 믿음일지라도 계속 도전하고 도약하여 더 단단해지고 있는 우리 사랑의 삶을 기쁘게 응원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모자란 게 많아서 더 마음이 쓰이는 우리, 허약해서 더 손길이 가는 못난 우리를 위해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 사랑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종일, 세례받으신 예수님을 축하해드리는 마음으로 지내면 좋겠습니다. 주님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서 진짜로 행복하다고 자꾸만 고백해드리면 좋겠습니다. 더해서 그분께 인정받는 ‘된 사람’으로 우뚝할 것을 다짐하면 참 좋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힘을 거슬러 용약하는 역동적 삶을 살아가게 되는 놀라우신 은혜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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