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주일 - 주님의 기적, 내 삶의 표징으로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2.01.16 발행 [1646호]
상대방이 내 부탁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장황한 말을 늘어놓기 마련입니다. 지금 자기가 얼마나 딱한 상황에 처했는지, 그래서 청하는 것이 얼마나 간절히 필요한지, 만약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게 되는지를 부풀려 말하게 되지요. 그래야 자기가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 기도할 때는 단순한 말로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면 됩니다. 성모님이 그러셨지요. 혼인 잔치가 한창인 한밤중에 포도주가 동나버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신혼부부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예수님께 말씀드리셨습니다. 기도하는 데 중요한 것은 말을 많이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믿고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청하는 것들을 즉시 이뤄주시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보시기에 가장 적당한 때에, 여러 상황이나 조건들이 함께 작용하여 최선의 결실을 맺을 때가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움직이십니다. 예수님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을 성모님께 분명히 밝히시지요.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라고 번역된 문장의 그리스어 원문은 직역하면 “당신과 나 사이에 무엇이?”라는 물음입니다.같은 문장이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성경의 다른 대목에서는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에 선을 긋고 거리를 두시는 듯한 예수님의 태도가 차갑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예수님은 성모님의 청을 거절하신 게 아닙니다. 주님께 무엇인가를 청하기 전에, 그분과 나를 하나의 관계로 묶는 근본적 힘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그 힘은 ‘믿음’입니다. 그분의 의중을 간파하신 성모님은 일꾼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기도의 본질을 오해하는 분이 많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이용해 내 뜻을 이루는 거라고. 하지만 기도의 본질이자 목적은 주님과의 소통을 통해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해 당신 뜻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나를 위한 최선의 길이자 최고의 선택임을 믿고 그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과정이 참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게 무엇인지 당최 알기 어렵습니다. 그분의 뜻을 알더라도 그것을 따르는 것이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시련과 고통을 해결하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되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던 일꾼들도 그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떨어진 건 술인데 왜 물을 채우라는 건지, 물독을 다 채워도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의심과 걱정은 놀라움과 환호로 바뀝니다. 물이 포도주로, 그것도 맛과 품질이 ‘좋은 포도주’로 변한 겁니다. 심지어 그 양마저 어마어마합니다. 두세 동이 짜리 물독 여섯 개 분량이면 대략 600ℓ쯤 됩니다. 750㎖짜리 큰 와인병으로 800병 되는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놀라운 방식으로, 차고 넘치도록 충만한 은총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 이 사건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이때부터 ‘공생활’이라는 구원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요한 복음이 이 사건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표징’이라 부른 것은 그 때문입니다. 표징이란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시’를 뜻하지요. 우리는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을 그저 기이한 사건으로 바라보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기적이 내 삶의 표징이 되어야, 주님 때문에 내 삶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야 의미 있는 신앙생활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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