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재판관이 아니라 포도재배인이 되어 사순 제3주일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2.03.20 발행 [1654호]
잘못을 만회할 기회가 있고, 더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만 더 실패하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주눅이 든 채 그 일에 임하면 제 실력을 발휘해보지도 못하고 나중에 후회할 결과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로 가길 바라실까요?
예수님 시대에 유다교는 재난과 불행을 인간이 죄를 지은 대가로 하느님이 내리는 벌(罰)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보면 그것을 잘 이겨내도록 돕기보다 그들이 ‘그런 일을 당해 마땅한’ 이유를 찾으려고 했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닥치는 재난과 불행이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재난이나 불행이 각자가 저지른 죄에 대한 결과로 주어지는 벌이라면, 그 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부족한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고 하느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재난과 불행이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감당하기가 수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 불행을 당하는 사람이 나 자신이라면, ‘하느님이 나를 버리셨구나’라고 생각하며 절망할 것입니다. 그 불행을 피한다고 해도, 다른 이가 그것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언제든 그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갈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난과 심판을 구분하심으로써 ‘죄=멸망’이라는 왜곡된 구원관을 바로잡고자 하십니다. 사람은 죄를 지은 대가로 하느님에게 벌을 받아 멸망하는 게 아니라 ‘회개하지 않아서’, 즉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고 자신을 병들게 하는 잘못된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서 스스로 멸망의 구렁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처럼,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돌려 그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분께 내 전 존재를 의탁하고 내맡길 수 있다면 우리는 우연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불행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며 구원과 참된 행복을 누릴 복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여정을 걸을 때 주목해야 할 것은 재난과 불행을 피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하느님이 책임을 물으시고 벌을 주시는 무서운 분이 아니라, 생명을 심고 기다리시는 자비로운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모든 생명이 잘 자라 풍성한 열매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덕분에 사는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개’라는 열매를 맺어 그분께 보답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당장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버려지리라는 두려움으로 자신과 타인을 재촉해서는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나를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하고 귀한 존재로 아껴주시며, 어떻게든 생명과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야만 그런 회개가 가능하지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깊이 느낀 사람은 잘못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영적 나태함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신 하느님이 나에게 바라시는 것, 내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소명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죄라는 분명한 인식 속에서 매일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는지는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재판관이 아니라 ‘포도재배인’입니다. 내 이웃 형제자매들의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는’ 것, 나의 작은 사랑, 선행, 양보, 배려, 이해, 용서, 포용으로 주변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실천하도록 돕는 게 우리가 할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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