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조창환 시인 / 나비와 은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12.

조창환 시인 / 나비와 은하

 

 

여름날 오후, 하늘 캄캄해지고 후드득 비 쏟아진다

먼 데 하늘이 우르룽거리다가, 번쩍 번개 친다

 

빈방에 홀로 앉아 제미니 망원경이 포착한 우주 사진을 본다

100억 광년 저쪽의 은하들이 목화솜 같다

121억 광년 저쪽에 있는 퀘이사* 에서, 깜빡 조는 듯한, 흰 빛이 온다

 

희끄무레하고 안개꽃 같은 나선은하

흥분한 듯 불그스레하게 번져 있는 원반은하

대질량의 별이 태어났다가 죽어가는 밀집은하군 들여다보며

숨 막힌다.

 

막힌 숨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니,

비 그친 허공에 나비 난다

나비는 비틀거리지만, 주저앉지 않는다

목화솜 같고 물비늘 같고 서산 갯벌 같은

마스크 쓴 세상도 주저앉진 않겠지

비틀거리면서, 흔들거리면서

100억 광년 저쪽으로 막힌 숨 내보낼 뿐

 

*퀘이사(Quasar) : 블랙홀이 주변 물질을 집어삼키는 에너지에 의해 형성되는 거대 발광체.

 

- 시집 <나비와 은하> 2022, 도서출판 도훈 -

 

 


 

 

조창환 시인 / 이런 세상 1

 

 

- 오늘 확진다 몇 명이유?

- 천 명? 이천 명?

- 사망자는?

- K방역 덕분에 세상은 태평해요

수심가 조로 웅얼거리며

입마개 안으로 고인 침을 삼킨다

 

외지고 쓸쓸하고 무거운 응달

단청 다 날아간 내소사 처마 끝 같은 허공

막막한 그늘이 마른 시래기 부서지는 소리를 낸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 컹컹 울리고

영월 청령사 터 오백나한 중 제일 못생긴 얼굴 하나가

콩 꽃처럼 웃다가, 다시 찡그린다

 

이런 세상 사는 일은

눈물 엉긴 검은 빵 씹는 것 같다

철문 근처에서 날두부를 입에 넣는

만기 출소 복역수를 부러워하며

달력을 찢고 있는 무기수 같다

 

- 시집 『나비와 은하 2022, 도서출판 도훈 -

 

 


 

조창환(曺敞煥) 시인

194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문학박사. 1973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1985년 <라자로 마을의 새벽>으로 제17회 한국시인협회상, 제5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수상. 아주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역임. 시집 <빈 집을 지키며> <라자로 마을의 새벽> <그때도 그랬을 거다> <파랑눈썹> <피보다 붉은 오후> <수도원 가는 길> <신의 날>.  저서<한국 현대시의 운율론적 연구> <문학의 이해와 감상> <한국현대시인론>. 현재 아주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