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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신영 시인 / 낮은 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12.

김신영 시인 / 낮은 땅

 

 

생명이 불완전한 곳에서

자신의 꼴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태학자의 말을 지팡이 삼아

온 하늘, 꼴을 만들기 위해 산을 오른다

 

킬리만자로에서는 산 중턱에서 한참

스스로의 영혼이 따라오는지 살핀다는데

명이나물은 겨울을 나기 위해

가을이면 뿌리에 헝겊을 직조한다는데

 

나는 영혼이 따라오는지 기다린 적이 없고

겨울을 나기 위해 헝겊을 직조한 적이 없다

 

저만치 영혼이 보이지 않는데도 앞서서 걷고

해마다 겨울은 혹독하여 낮게 땅에 엎드린 채

 

그리하여 자기의 하늘을 열기까지

높은 산에서 조금씩 자란다는 주목처럼

그리하여 나의 하늘을 열기까지

낮은 땅에서 조금씩 꼴을 먹고

영혼을 기다려 충분히 혹독을 견디기로 한다

 

하여, 늘 푸른 잎을 달지는 못하더라도

달콤한 열매는 달아야지

모두 열매에 가지에 꽃에

자기만 살고자 독하게

가시를 달고 독을 넣기도 한다는데

나는 가시없이 달콤한 열매로 남아야지

 

아직 오므리지 못한 꽃방에

당신을 초대하는 안내선을 두고

불완전을 넘어서기 위해

인생들에게 단 열매를 주기 위해

더 많이 날고 더 많이 춥고

더 많이 외로웁겠다

 

 


 

 

김신영 시인 / 별등을 달다

-점등인의 사명

 

 

하늘에 별등을 달고

영혼에 별등을 다는

하나님의 창에도 환한 등을 다는

모든 마음에 별등을 다는 일이

천직인 착한 시인

 

오늘을 점등하러 골목을 나선다

사람마다 난삽한 영혼의 지도

어둠마다 맑은 별등을 달고

 

자전거를 몰아

집으로 돌아오는 신새벽

그대의 마음 창가에도

등에 반짝거리는지 올려다본다

 

사람들 가슴에 한 빛, 별을 켜는 일

그 천직으로 고된 하루를 보내고

공원을 돌아 나오면

유엔 성냥으로 확 그어지는 불꽃

미욱한 가슴이 조금씩 환해진다

 

반짝이는 별을 간직한

라디오 진행자가

점등하는 모든 시인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고

나도 그에게 목례를 한다

 

-김신영, 『마술상점』, 여우난골, 2021년

 

 


 

김신영 시인

1963년 충북 중원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4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불혹의 묵시록』 『맨발의 99만보』 『마술 상점』과 평론집 『현대시, 그 오래된 미래』(한국학술정보, 2007)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기독시인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