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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운지 시인 / 갈라파고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18.

권운지 시인 / 갈라파고스

 

 

적도 아래 갈라파고스가 있다

거센 해류와 수많은 암초로

바다 한가운데 저마다 고립되어

섬마다 방울새나 거북이가 진귀한 진화론을 쓰고 있는

갈라파고스 갈라파고스 갈라파고스

나직이 되뇌어보라

멀지 않은 곳에 갈라파고스가 있다

춘란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무실

책상 아래 무수히 뒤엉킨 전선들

수백만 볼트에도 감전되지 않는

잠을 잊은 야행성으로

생존을 위한 이 혹독한 진화

우리는 이 섬의 고유종이 되고 있는 것이다

 

- 『현대시학』(2012년 1월호)

 

 


 

 

권운지 시인 / 사신私信

 

 

 내실의 쥐똥나무가 수상하다. 명확한 확증의 단서를 잡지 못한 채, 오늘 비로소 우수를 보내고, 절제된 가지의 긴긴 침묵 위로 더디게 다가오는 적소謫所의 봄, 겹겹으로 에워싼 감시망을 뚫고, 무엇이 화분의 쥐똥나무를 설레이게 하였는지 오늘밤 내가 지켜보고자 한다. 밤이 깊을수록 유혹의 손길은 끊임없고 홀로 버티는 파수꾼의 밤은 곤혹스럽다. 못 미더워, 완강한 철제대문의 문고리를, 거실의 이중창들을, 방으로 통하는 출구의 자물쇠를, 열두 번씩이나 부정해 보는 오늘밤도 첫닭의 울음소리는 목전에 당도하고, 이 완벽한 차단의 담벼락을 뚫고 들어와 두드러진 잎눈마다 봉인의 밀서를 걸어 두고, 무엇이 이 방을 다녀간 것인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시집 <갈라파고스> 2011. 만인사

 

 


 

권운지 시인

1951년 경북 문경 출생. 본명 권점출(權点出), 영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198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소작인의 가을』과 『빈 집의 나날』  『갈라파고스』 등이 있음.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대구문인협회 및 대구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