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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분임 시인 / 몸의 기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19.

최분임 시인 / 몸의 기원

 

 

나사*가 달이 양수처럼 품은

물을 발견했다는 뉴스를 듣는 저녁

툭, 바닥으로 떨어진 서랍 손잡이

애벌레 같은 나사를 조이다 보면

우화羽化를 꿈꾸는 내 겨드랑이에도

문득 날개 한 쌍 돋아날 것 같은데

둥실, 떠오른 역마살이

무중력 오랜 잠의 가장자리에

발끝을 내려놓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거기 달의 치마폭 적막만이 어슬렁거리는 밤

쉬이 잠들지 못한 물방울 하나가

떠돌이 물방울 하나를 끌어들여

꿀벌처럼 뜨겁게 잉잉대다가

툭, 뱉어낸 꽃 한 송이

어머니의 어머니를 만날 것도 같은데

 

전생이 끊고 나온 탯줄 끝

벌 한 마리 날아들지 않아 얼어붙은 씨방 속

그리움의 더듬이 금 가는 소리 들리는데

미처 사타구니를 빠져나오지 못해

발원의 골짜기를 거스른 눈물이

결빙에서 풀려나 별로 깜빡이는데

 

조여지지 않는 서랍의 나사처럼 생각이 헛도는 밤

양수 검사하듯 찔러 넣은 로켓에

텅 비어버린 자궁 하나 둥실 떠오르는데

 

우화가 끝나지 않은 행성

돌아갈 내 방이 아직 둥글고 따뜻한데

 

*나사 (NASA) : 1958년에 미국의 우주 개발 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설립된 정부 기관

 

월간 『월간문학』 2022년 4월호 발표

 

 


 

 

최분임 시인 / 허기에 관한 보고서

 

 

눈 내리는 고비사막

무리에서 쫓겨난 지 오래인 듯

듬성듬성 털 빠진 늑대 한 마리

뚱뚱해지는 지평선을 질질 흘릴 때

 

너를 비우기 위해 떠나온 이곳

들이치는 공복에 휘청거린다

 

게르를 읽는 늑대

언덕 아래 봉긋한 한 끼를 향해

얼어붙은 털을 보초처럼 흔들어 깨운 후

두고 온 새끼들이 메아리치는 목울대를 훌쩍 뛰어넘어

채 핏기 가시지 않은 양 한 마리 물고 나온다

 

너를 잃은 내 입맛도

짐승의 습성으로 돌아오고 있는지

흩날리는 눈발을 경계도 없이 물어뜯는다

 

뼈째 씹히는 사막

맹렬한 외로움을 제물로 차린 늑대

헛묘 같은 뱃구레를 향해 긴 울음의 제祭를 올리면

식솔들에게 전하는 기별

핏발 선 눈동자가 쓰고 있다

 

제의祭儀를 마친 비린내 뚝 떼어 음복처럼 나눌 새도 없이

눈보라가 한 줌 털을 물고 저만치 달아나면

뚝 뚝 핏자국을 따라 몰려드는 검독수리 떼

 

삶을 저만치 뼈다귀처럼 던져두지 못하는 땅

끝내 물러설 수 없는 허기가

남은 한 끼처럼 어슬렁거리고 있다

 

-반년간 『용인문학』 2021년 상반기 발표

 

 


 

최분임 시인

경북 경주에서 출생.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 제12회 동서문학상 대상 수상하며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실리콘 소녀의 꿈』이 있음. 2005년. 제23회 마로니에 전국 여성백일장 산문부문 장원 수상. 2017년 제8회 천강문학상 시부문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