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 착한 사마리아 사람 제1독서 신명 30,10-14 / 제2독서 콜로 1,15-20 복음 루카 10,25-37 가톨릭신문 2022-07-10 [제3302호, 19면]
하느님 뜻 따르는 사람이 하느님 백성 서로 화합하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 이웃 위한 삶 속에 희망의 길 있어
빈센트 반 고흐 ‘착한 사마리아인’ (1890년).
처음 본당신부로 발령받은 신설 본당에는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아니, 제대로 갖춘 것이 없었습니다. 찌그러진 가건물에서 일단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교우들 입장에서는 불편한 게 한 둘이 아니었지요. 추위와 더위는 물론이고, 천장이 워낙 낮아서 미사 때 조금만 뒷자리로 가도 제대는커녕 앞사람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허름한 이동 화장실은 민망한 지경이었고, 컨테이너 교리실에 비닐하우스 회합실까지 궁상도 그런 궁상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그 시절을 고마움과 그리움 속에 뒤돌아볼 수 있는 것은, 가진 게 없는 만큼 하느님께 더 기대고 형제자매들에게 더 집중했던 때문이겠지요. 기도는 간절했고 형제애는 애틋했으며 공동체는 더 가까웠습니다. 아마 성전을 지어본 교우들은 대개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터입니다. “같이 고생하던 그때가 좋았지!”
정신의학에서는 자기 소망과 기대에 맞게 과거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왜곡하는 것을 ‘회상 조작’이라고 부릅니다.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시절’ 같은 추억은 회상 조작이라는 방어기제를 통해서 과거에 분칠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진심과 진심이 만나는 체험, 그 위에 손길을 펼치시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한 번이라도 겪은 사람에게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남게 마련입니다. 빛나는 대리석과 육중한 기둥에 시야가 막혀 있다가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 ‘그 이상의 것’에 눈을 두게 하는 진실은 분명 존재합니다.
오늘 첫째 독서는 그런 진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첫째 독서가 전하는 모세의 가르침은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로 나선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책으로 다듬어 기록하고 깊이 새기던 시기는 유다 왕국의 몰락과 성전 파괴, 그리고 유배 시기에 닿아 있습니다. 더 이상 번제를 올릴 성전도, 까다로운 제사 규정을 가르치고 지킬 방법도 없던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구심점을 발견합니다. 그간 쌓아올린 제도와 건물들이 허물어진 가운데, 그들은 하느님 말씀에 따라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데서 하느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한 것입니다. 범접할 수 없는 지성소에서 하느님을 찾는 대신 첫째 독서에서 보듯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는”(신명 30,14)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라는 권고를 따릅니다.
과연 하느님은 특별히 선별된 이들만 알 수 있는 현묘한 가르침과 까다로운 규정 속에 숨어 계시지 않았습니다. 화답송 시편이 노래하는 것처럼 그분은 고통 속의 애원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는 분이요, 참된 구원이십니다. 하느님은 어떤 불안 요소도 다 막아낼 철옹성 안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분, 그리하여 고통의 순간마저 은총의 때라고 고백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제 하느님의 백성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명료하게 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둘째 독서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초대교회는 구약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콜로 1,15)을 중심으로 모여듭니다.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만물이 화해하는 일치의 중심이십니다. 세상 곳곳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눈에 보이는 집이 없다 하더라도 주눅 들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갖은 불화와 반목, 갈등을 넘어 모여든 것이지요. 교회를 지칭하는 그리스 말 ‘에클레시아’(Ekklēsia)가 불러서 모인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회는 십자가를 통해 당신 백성을 부르시는 그리스도께 응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이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가버린 사람들이 하필 사제와 레위인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여느 사람보다 하느님께 더 가깝다고 여겨지던 그들,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던 그들은 막상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지켜야 할 규정과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발걸음은 분주한데, 정작 어디로 향해야 할지 방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 부르시는 하느님을 지나쳐서 바쁜 걸음을 재촉합니다. 힘은 힘대로 쓰는데, 방향이 잘못되었으니 헛수고를 면치 못할 신세입니다.
두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지켜왔던 많은 전통들과 제도들이 하릴없이 주저앉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형제자매들을 만나야 할 공간이 텅텅 비었습니다. 첨단의 온라인 장비를 동원해도 성사 생활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활력을 잃은 신앙과 만남이 없는 성전에 회의를 느낀 사람도 많았습니다. 어디서 활로를 찾아야 할지 고심이 깊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희망의 길이 이미 주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있었고 지금도 존재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길잡이들입니다. 코로나19 사태 중에도 어떻게든 하느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분투하는 착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아침마다 어르신들에게 안부 전화를 돌리던 어느 젊은 신부님이나, 홀로 사는 어르신들에게 반찬을 배달하며 닫힌 마음에 작은 창을 열어준 이들, 대화에 목마르고 정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기꺼이 말 상대가 되어준 이들은 우리 시대를 사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자기 역할을 다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세상의 빛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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