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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말씀묵상]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기도와 실천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17.

[말씀묵상]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 기도와 실천,

균형을 갖춘 신앙인이 돼야 합니다

제1독서 창세 18,1-10ㄴ / 제2독서 콜로 1,24-28

복음 루카 10,38-42

가톨릭신문  [제3303호, 19면]

 

 

공동체 위한 봉사 강조하시면서도

균형 맞출 영적 생활 바라신 주님

사랑 실천에는 기도가 전제돼야

 

 

 

아돌프 치머만 ‘그리스도 곁의 마리아와 마르타’.

 

 

■열심히 기도했다면, 이웃사랑 실천의 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 감사한 마음으로, 때로 안쓰러운 눈길로 결코 만만치 않은 공동생활을 해나가고 계시는 수녀님들을 바라봅니다. 다양한 수녀회 이름 아래, 각기 다른 카리스마를 지닌 많은 수녀님들이, 제각각 다른 삶의 방식을 살아가고 계십니다.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주님의 딸이자 종으로서 축성생활을 해나가고 계십니다.

 

한 봉쇄 수녀원에 강의를 갔었는데, 강의 때조차도 강사와 수녀님들의 공간은 분리돼 있었습니다. 저는 창살 이쪽 편에서 강의를 했고, 수녀님들은 건너편에 앉아서 강의를 들으셨습니다. 수녀님들은 자신들을 수녀원 봉쇄 구역 안에 가두고, 자나 깨나 하느님을 찾는 동시에, 수녀원 담 밖의 동료 이웃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한번은 또 다른 수녀원을 방문했는데, 그 수녀원은 전철역 근처 청소년 출입 금지 구역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똑같은 주거 조건 속에서 사시면서, 그저 그분들의 이웃이 돼주고 있었습니다.

 

어떤 수녀님들은 하루 온종일 바빠 죽습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수도자로서 기도와 묵상에 충실해야 하고, 미사도 봉헌합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학교로 달려갑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담임교사로서 분주한 하루를 보냅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조차도 아이들과 같이 보냅니다. 퇴근 시간이 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녀원으로 돌아오는데, 그냥 쉬는 법이 없습니다. 또다시 저녁 시간 수도자로서의 삶이 이어집니다.

 

보시는 바처럼 하루 온종일 기도와 묵상·관상, 노동으로 보내는 관상 수녀회가 있는가 하면, 하루 온종일 강도 높은 활동으로 보내는 활동 수녀회가 있습니다. 그럼 둘 중 어느 수녀회가 더 주님 마음에 드는 수녀회일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교회와 주님, 그리고 동료 이웃을 위해 관상 수녀회든, 활동 수녀회든, 둘 다 소중하고, 둘 다 나름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살짝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시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마리아의 판정승을 선포하는 형국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복음 10장 41~42절)

 

그러나 사실 예수님 말씀의 진의(眞意)는 마르타의 봉사활동을 무시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웃사랑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 사랑의 실천은 언제나 말씀이나 기도가 전제되어야 하고, 굳게 결부되어야 함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바로 전 대목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공동체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봉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주님 말씀에 대한 경청과 기도 생활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바로 뒷부분에 마리아와 마르타의 비유를 배치시킨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비유를 묵상하다 보면, 표면적으로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마리아만 칭찬을 듣고, 땀을 뻘뻘 흘리며 주방에서 지지고 볶는 마르타의 봉사활동은 무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먼저 적극적인 봉사활동이 강조됐으며, 이어지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비유를 통해 다른 한쪽 측면인 영적 생활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한 신앙인의 삶의 방향이 마리아나 마르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통해 깊은 영적 생활에 몰입을 했다면, 그냥 그 상태로 자아도취나 황홀경에 빠져 있어서만은 절대 안 됩니다. 열심히 기도했다면, 그 힘을 바탕으로 이웃사랑 실천의 장으로 나아가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균형 잡힌 신앙생활이요, 활동하는 관상가의 모습인 것입니다.

 

■ 관상기도를 통해 다시 한번 하느님 사랑의 우물가로 나아갑시다!

 

관상(觀想)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던 제게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진정한 의미의 관상은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하느님께서 나를 바라보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느님께서 측은지심 가득한 자비의 눈길로 가련하고 죄 많은 나를 바라보는 것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이 관상기도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 특히 내 안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현존하시고, 그분께서 나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며, 순간순간 흘러넘치는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주심을 의식하는 것이 관상이라고 하는 말씀에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관상기도에 맛을 들인 사람은 애써 의식적으로 기도하려고 발버둥치지 않습니다. 순풍에 돛단배처럼 그저 그분 사랑의 손길에 내 온 존재를 내맡깁니다. 그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현존 앞에 머무르며 행복함을 느낍니다. 그분께서 이글거리며 불타는 사랑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에 만족하며 그분만으로 충분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관상의 본질입니다.

 

그런 관상기도에 맛을 들인 사람은 지나가는 세상 것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습니다. 명예도 높은 자리도, 세상의 부귀영화도 값나가는 보화들도 다 부질없습니다. 그저 주님 현존만으로 충분합니다. 뿐만 아니라 관상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긴밀한 통교의 결과로 동료 인간들과도 잘 지냅니다. 애써 경쟁하려하지 않습니다. 이웃이 잘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습니다. 예의 바르고 균형 잡힌 소통의 결실로 동료 인간들과 함께하는 삶이 편안하고 풍요롭습니다. 관상기도가 가져다주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와 반대로 영적 생활이나 관상 생활로부터 점점 멀어져 아예 담을 쌓고 살아가는 이웃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영적 생활과 기도 생활은 그저 빨리 해치워야 할 의무요 요식행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의 핵심이요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영적 생활이 허물어지니 남은 것은 그저 자신의 낡은 육신 그것뿐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하느님께 민폐요 모독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한번 하느님 사랑의 우물가로 나아갈 때입니다. 깊고 맑은 하느님 사랑의 샘 속으로 죄와 냉담함과 갈증으로 얼룩진 내 가난한 두레박을 드리울 때입니다.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는 1994년 사제품을 받고 영성신학 전공으로 로마 살레시오대학교를 졸업했다. 지금까지 서울 대림동 수도원 원장, 수련장 및 대전 정림동 수도원 원장, 서울 관구관 원장, 부관구장, 관구장 등을 역임해 왔다. 현재 태안 내리공동체 원장 겸 살레시오 피정센터 담당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