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 주님께서 찾는 한 사람 제1독서 창세 18,20-32 / 제2독서 콜로 2,12-14 복음 루카 11,1-13 가톨릭신문 2022-07-24 [제3304호, 19면]
열 명의 의인 찾지 못해 멸망된 소돔 인류 구원 위해 보내신 예수님처럼 정의와 공정 넘은 사랑의 삶을 통해 세상으로 하늘의 은혜 끌어당겨야
제이콥 드 웨트의 ‘불타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1680년)
오늘 교회는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이하여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의 역할과 소명의 소중함을 기리며 감사드립니다. 교회의 뜻에 부합하여 함께 지내지는 못하는 부모님께 안부 인사라도 전하면 좋겠습니다.
장손인 저를 할머니는 편애하셨습니다. 그것이 기울어진 잘못된 사랑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는데요. 동생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장손자를 향한 그 전폭적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 맹목적인 사랑이 오늘날 저를 있게 했으니까요.
솔직히 저에게 할머니는 ‘밥’같이 만만했습니다. 그런데 성당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사뭇 달랐습니다. 학교가 파하면 득달같이 성당 마당에 모여서 공을 차던 우리는 매번 “성당에서 뛰지 말라”는 할머니들의 호통 소리를 들었던 겁니다. 표정도 어찌나 싸늘하신지, 모든 일에서 막무가내였던 개구쟁이들도 별수 없이 풀이 죽곤 했는데요. 나중에 복사를 설 때, 맨 앞줄에 앉으신 할머니들이 복사의 잘못만 지켜보는 것 같아 지레 마음이 얼어서 연발 실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린 저에게 무엇보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미사가 끝나도 할머니들이 계속 성전에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침내 할머니들은 죄가 너무 많아서 저렇게 오래오래, 매일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오해를 하기도 했지요. “아이고 얼마나 죄가 크고 많으면…”싶은 마음에 딱하고 가여워하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제가 된 저는 이제 그분들의 길고 긴 기도가 세상을 살리는 버팀목임을 압니다. 매일 매일 기도서에 담긴 모든 기도를 바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충실하고 성실한 할머니들의 기도가 교회를 살려주는 은혜의 마중물임을 느낍니다. 추위도 더위도 상관치 않고 성전의 앞자리에서 바쳐주시는 꾸준하고 절실하며 질긴 그 기도가 교우들을 돕고 사제들을 지키는 귀하고 복된 은총의 보배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이 주일을 빌어 더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을 읽다가 마음 한구석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배려하시는 모습과 우리가 일상에서 예사로이 사용하고 있는 차별의 언어가 비교되었던 겁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에만 집중하여 그 구절을 큰소리로 따라 읽었습니다. “내가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숨김없이 알려주십니다. 하늘의 비밀을 들려주시며 극상의 존재로 대우하십니다. 잘나면 잘난대로 못나면 못난대로 한 치의 차별 없이 귀하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비밀, 즉 소돔성의 멸망 계획을 털어놓으십니다. 소돔이 저지른 죄악이 주님의 저울에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라고 이유까지 설명해주십니다. 그래서 더욱 소돔의 멸망을 다시 고려해 주실 것을 거듭 간청했던 아브라함의 마음씀이 돋보입니다.
만약에 그가 소돔의 막가는 삶의 행태를 비웃고 힐난하는 쪽이었다면 그날도 벌을 받아 마땅하다며 역성을 들거나 고자질을 보탰을 것도 같은 겁니다. 어쩌면 “옳으신 주님의 판결이니 어련하시겠냐!”라거나 “혼쭐이 나도 마땅하다”라며 속으로 고소해했을 것도 같은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그들을 위해서 몹시 조심하면서도 간곡하게 애원합니다. 참으로 믿음의 선조답습니다. 그 탁월한 인품의 향취에 하느님이 감동하신 것이라 싶습니다.
그날 아브라함은 소돔을 구하기 위해서 주님의 공정은 결코 의인을 죄인과 함께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끈질기게 줄다리기 협상을 벌였습니다. “쉰 명”에서 “마흔다섯”으로 “마흔”에서 “서른”으로 조심조심 주님의 의중을 타진하면서 조마조마했을 겁니다. 심장은 콩닥콩닥 나댔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라는 주님의 다짐을 받아냈을 때, 아브라함은 “후유~” 하고 큰 숨을 내쉬었겠지요. 설마 그 큰 도성 안에 겨우 열 명의 의인도 없을 것이라곤 상상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의인 열 명쯤이야 충분히 존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이쯤에서 열 명의 의인을 찾지 못해서 끝내 소돔을 멸망시키셨던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패망시키기 전에는 ‘단 한 사람의 의인’을 찾으셨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예루살렘에서 “올바르게 행동하고 진실을 찾는 이”를 찾기만 하면 “내가 그곳을 용서할”(예레 5,1) 것이라고 의인의 숫자를 확 줄여서 협상해 오신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결국 단 한 사람의 의인을 찾지 못하여 패망을 결정하셨던 주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의인 한 사람을 찾을 수 없는 세상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구석구석 살펴봐도 마침내 멸망당할 죄악만 가득한 세상이 가엾어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의인의 삶을 넘어 사랑의 삶으로 하느님을 감동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세상은 하느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의인 예수가 있어서 구원되고 있습니다. 끝내 의로운 사람을 승리하게 하시고 언제나 공정한 사람들로 인해서 나라와 민족과 이웃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실 것이란 주님의 약속은 세상 끝날까지 유효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오늘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하늘의 은혜를 끌어당기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닮은 ‘거룩한 욕심쟁이’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비뚤어진 세상에서 정의와 공정을 온전히 살아, 고귀한 어른으로 기억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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