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봉 시인 / 겨울방학
내 나이 그새 서른하나 어쩌다 잘못 시작한 공부를 하겠다고 쫓기는 마음으로 책을 잡는다 친구들은 모두 장가를 들어 어허 춥다, 안방에 누워 여우 같은 마누라와 자식새끼들 솜털 같은 사랑을 어우르는데 공부는 해서 무엇에 쓰나 무수한 돌팔매에 얻어맞으며 빌려 쓰는 연구실 창밖엔 눈 내리고 엉덩일 부비며 눈 내리고 배고프지, 어지러운 세상을 향해 나는 뜻 모를 헛소리를 중얼거린다 학생들은 나보다 더 폭폭해서 번번이 올라와 치를 떠는데 그나마 식민지 토막난 나라 오오, 중진국 가난한 젊은 학자여 주당 일곱 시간 시간강의도 실은 얼마나 큰 혜택인가 살뜰한 부모님 못 뵌 지 오래 고향 눈보라 속 청청한 소나무를 생각다 보면 텅 빈 외양간, 녹슨 쇠고랑을 생간다 보면 잘도, 타는구나 먼 나라 중동에서 온 석유, 난로 위엔 구수한 라면이 끓고 나는 또또 콧노래 중얼대며 책을 잡는다 그만 악착같이 책을 읽는다.
이은봉 시인 / 눈
눈이 내린다 두런두런 한숨 속으로 저희들끼리 저렇게 뺨 부비며 눈이 내린다 별별 근심스런 얼굴로 밤새 잠못이룬 사람들 사람들 걱정 속으로 눈이 내린다 참새떼 울바자에 내려와 앉는 아침 아침 공복 속으로 저희들끼리 저렇게 뽀드득 뽀드득 어금니를 깨물며.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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