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시인 / 엄마
세금을 내듯이 엄마를 만나러 간다. 엄마도 세금을 내듯 나를 돌봤을까? 묻지 않을 거다. 온몸을 떨며 헌금을 바치는 기분이었다고 말할 테니까. 엄마가 사랑하는 신이 사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 파란색이 내 눈 속에서 종소리처럼 울린다. 엄마가 날 사랑했다는 흔적을, 언젠가 호박화석 속의 검은 벌처럼 찾아 헤맨 적이 있었다. 곧 그만뒀다. 나는 고생물학자가 아니었으니까. 어딘가에 벌이 있었고 꽃들이 있었겠지. 나는 불량 체납자다.
진은영 시인 / 종이가 있다
당신은 물 아래에서 당신을 지켜보는 그 무엇도 안 보이나요? -마거릿 애트우드*
파랑의 드넓은 수조에 네모난 지느러미의 오렌지색을 키울 수 있다.
마크 로스코는 색의 어부였다, 종이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바다보다 깊다. 모든 심해의 색들이 산다.
현실은 그 위에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다 종이는 얇으니까,
현실은 환상적으로 구겨지니까, 깜박 졸다 깨어난 하느님의 커다란 손안에서.
얇다, 그래야 그의 계획대로 대화재 속에서 우주가 헌책처럼 잘 타오를 것이다.
가장 못마땅한 피조물이다. 아무 때나 먹고 마시며 제멋대로 불타는 사랑
바람의 텅 빈 입 속에 흰 재들 휘날리는.......
표면의 날씨는 너무 춥다. 손가락으로 종이에 불꽃 모양의 구멍을 뚫어라뚫어라. 무엇이 보이는가, 저편 한 사람이 막 생겨난 유골단지에 손을 데우며 재가 되어 버린 것들의 뜨거움에 대해 쓰고 있다.
사각 모서리에 매달린 애매하게 빛나는 판명성――긴 고드름들 어쩌면 얼음 촛대를 따라 흐르는 슬픔의 밀랍들
녹았다 얼었다 망설임의 알 수 없는 대기로부터 구겨진 종이뭉치, 한밤의 소금이 떨어진다.
태초의 바다에 눈 내리는 아침처럼 영원히 파란
-Littor. 2022년 6/7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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