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진은영 시인 / 엄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2.

진은영 시인 / 엄마

 

 

 세금을 내듯이 엄마를 만나러 간다. 엄마도 세금을 내듯 나를 돌봤을까? 묻지 않을 거다. 온몸을 떨며 헌금을 바치는 기분이었다고 말할 테니까. 엄마가 사랑하는 신이 사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 파란색이 내 눈 속에서 종소리처럼 울린다. 엄마가 날 사랑했다는 흔적을, 언젠가 호박화석 속의 검은 벌처럼 찾아 헤맨 적이 있었다. 곧 그만뒀다. 나는 고생물학자가 아니었으니까. 어딘가에 벌이 있었고 꽃들이 있었겠지. 나는 불량 체납자다.

 

 


 

진은영 시인 / 종이가 있다

 

 

당신은 물 아래에서 당신을 지켜보는

그 무엇도 안 보이나요?

-마거릿 애트우드*

 

 

파랑의 드넓은 수조에

네모난 지느러미의 오렌지색을 키울 수 있다.

 

마크 로스코는 색의 어부였다,

종이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바다보다 깊다.

모든 심해의 색들이 산다.

 

현실은 그 위에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다

종이는 얇으니까,

 

현실은 환상적으로 구겨지니까,

깜박 졸다 깨어난 하느님의 커다란 손안에서.

 

얇다, 그래야 그의 계획대로

대화재 속에서 우주가

헌책처럼 잘 타오를 것이다.

 

가장 못마땅한 피조물이다.

아무 때나 먹고 마시며 제멋대로 불타는 사랑

 

바람의 텅 빈 입 속에 흰 재들 휘날리는.......

 

표면의 날씨는 너무 춥다.

손가락으로

                종이에

불꽃 모양의 구멍을 뚫어라뚫어라.

무엇이 보이는가, 저편

            한    사람이

막 생겨난 유골단지에 손을 데우며

재가 되어 버린 것들의 뜨거움에 대해 쓰고 있다.

 

사각 모서리에 매달린

애매하게 빛나는 판명성――긴 고드름들

어쩌면 얼음 촛대를 따라 흐르는

슬픔의 밀랍들

 

녹았다 얼었다

망설임의 알 수 없는 대기로부터

구겨진 종이뭉치, 한밤의 소금이

떨어진다.

 

태초의 바다에

                눈 내리는 아침처럼

영원히 파란

 

-Littor. 2022년 6/7호 중에서

 

 


 

진은영 시인

1970년 대전에서 출생. 이화여대 철학과와 同 대학원 졸업.  2000년 계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2009년 제14회 김달진문학상 젊은 시인상, 2010년 제56회 현대문학상, 2013년 제15회 천상병 시문학상, 2013년 제21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현재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 및 인문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