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재기 시인 / 주름진 사과
주름진 사과를 깎는다 칼날을 드밀어도 주름에는 쉽사리 칼날을 허락하지 않는다 골 진 부드러움이 탱탱한 피부보다도 강하다 했던가 긴 세월 동안 아버지는 얼굴에 주름을 엮어 놓으셨다 아버지의 얼굴에 무디어진 나의 칼날
주름진 사과는 달다 껍질 채로, 한 입 한 입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구재기 시인 / 어린 것들은 하늘 높은 줄만 안다
아침 햇살이 시끄러워 문을 열고 나가 보았더니 나팔꽃들이 무리지어 햇살 모으기에 정신이 없다 씨알 너덧 뿌려 놓고 대나무 가지채로 꽂아 두었더니 어린 넝쿨이 언제 저리도 하늘 높이 솟아올라 이리도 야단스러울까 그러고 보니 담장 너머에서는 어린 호박 넝쿨이 솟아올라 울안을 엿보고 있다 오, 솟아오르는 것은 모두 어린 것들
참죽나무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하눌타리의 저 어린 넝쿨, 머루넝쿨, 다래넝쿨, 댕댕이넝쿨, 으름넝쿨, 칡넝쿨, 담쟁이넝쿨, 등넝쿨, 청미래넝쿨, 능소화넝쿨, 박주가리넝쿨… 하나 같이 솟지 않는 어린 넝쿨이 있으랴 저런 고이얀! 어린 것들이란 하늘 높은 줄만 안다 문득 넝쿨의 밑동을 본다 온몸이 갈라지고 터지고 검버섯처럼 돋아난 버겁에 싸여 혼신을 다하는 상처투성이 제일로 큰 상처로 앉아 돌아가신 아버지가 웃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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