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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연수 시인 / 오후 두 시의 관음죽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28.

《포엠포엠》 제1회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조연수 시인 / 오후 두 시의 관음죽

 

 

손가락이 자꾸 길어진다

길어진 손가락이 바닥에 떨어질 때

오후 두 시는 한없이 길어서 멈추어 선다

물렁한 살 위를 질척하게 옮겨 다니며 자는 잠이란

방처럼 늘 어두웠고 낡은 벽을 긁어대는 비명처럼 외로웠다

사타구니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미끈거리는 길,

핏물 젖은 손가락 그 물을 먹고 마디를 키운다

마디마디 맨살이 여자의 발목처럼 희고

오랜 관습은 손금처럼 새겨져 벽을 타오르고 있다

빽빽한 나무 그림이 흩어진다 후드득 새들이 날아오른다

움켜잡은 길들이 뻐근하다

손금 위로 잠든 시간이 먼지처럼

쌓이거나 흩어질 때 손가락이 자꾸 길어진다

멈춰진 오후 두 시가 몇 년 째 흐르고 있다

 

 


 

 

조연수 시인 / 전의역으로 가는 길

 

 

 기차역 계단에 쭈쭈바를 빨며 모자를 눌러쓴 너는 혼자였어 손끝에 봉숭아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지만 알지 못했지 손톱이 하얗게 비어 가는데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면 어쩌나 고민할 사이 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 했어 기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에서 상기된 얼굴로 올라타는 넌 발밑에 점점이 찍힌 붉은 자국을 보지 못했지 첫눈이 오는 전의역으로 간다는 사실이 모든 걸 지워버렸거든 의자에 앉은 너는 하얗게 얼굴이 비어 가고 있었어

 

 그곳에는 오래된 집이 있고 시계가 있고 낡은 종이인형에게 옷을 입히는 앙상한 손이 있지 하얀 목에 머플러를 두르고 멍든 무릎을 레이스 치마로 덮곤 했던 그 곳에는 낯선 새들이 가끔씩 머물곤 했어 새들이 날아올라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 겨울에도 붉은 봉숭아를 따곤 했지 손바닥이 가려워 살살 긁기도 했는데 어딘가 따끔거리게 하는 바늘이 있었는지도 몰라 지금도 어떤 밤에는 온 몸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아 그런 밤 너는 손톱을 자르고 타다닥 튀어 오르는 봉숭아 씨를 줍곤 하지

 

 첫눈이 오는 전의역으로 가는 길 꿈에서조차 잊지 못하는 질척거리는 그 길 톡톡 떨어진 봉숭아 씨를 주우며 걷고 있지 허름한 침목을 건너 끝이 없는,

 

 


 

조연수 시인

경남 함안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전문 과정 수료. 2014년 《포엠포엠》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