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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남준 시인 / 아름다운 관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29.

박남준 시인 / 아름다운 관계

 

 

바위 위에 소나무가 저렇게 싱싱하다니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

아무것도 키울 수 없던 불모의 바위였지

작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

돌도 늙어야 품 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날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흐르고 흘렀던가

바람에 솔씨 하나 날아와 안겼지

이끼들과 마른 풀들의 틈으로

그 작은 것이 뿌리를 내리다니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서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을 타고 굽이치는 강물 소리 흐르게 하고

새들을 불러 모아 노랫소리 들려주고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던가 피워본 적 있었던가

 

〈박남준 시선집> 펄북스

 

 


 

 

박남준 시인 / 깨끗한 빗자루​

 

 

세상의 묵은 때를 적시며 씻겨주려고

초롱초롱 환하다 봄비

너 지상의 맑고 깨끗한 빗자루 하나

 

 


 

 

박남준 시인 / 마음의 북극성

-이순

 

 

직진만이 길이 아니다

구비구비 휘둘지 않는 강물이 어찌

노래하는 여울에 이를 수 있는가

부를 수 있겠는가

나무의 상처가 뒤틀려서 한몸에

서로 다른 무늬를 만들듯

번뇌가 통점을 억누르며 영혼을 직조해나간다

꼭 그만큼씩 울음을 채워주던 강물이 말라갔다

 

젊은 날의 나침반이었던 내 마음의 북극성만이 아니다.

간밤에 미쳐 들여놓지 못한 앞 강이

꽁꽁 얼기도 했다

강의 결빙이 햇살에 닿으며 안개 또는 김발로 명명되고

가물거리는 아지랑이를 만든다

아~ 아지랑이

어쩌면 치미는 슬픔 같은 먼 봄날의 아지랑이

이렇게나마 겨우 늙었다

강을 건너온 시간이 누군가의 언덕이 되기도 한다

두 귀가 순해질 차례다

 

 


 

 

박남준 시인 / 기다렸으므로 막차를 타지 못한다

 

 

남은 불빛이 꺼지고 가슴을 찍어내리듯

구멍가게 셔터문이 내려지고

얼마나 흘렀을까

서성이며 발 구르던 사람들도 이제 보이지 않고

막차는 오지 않는데

언제까지 나는 막차를 기다리는 것일까

 

춥다 술 취한 사내들의 유행가가 비틀거리다

빈 바람을 남기며 골목을 돌아 사라지고

막차는 오지 않을 것인데 아예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 것처럼

발길 돌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일 같은지

막차는 오지 않았던가 아니다

막차를 보낸 후에야 막차를 기다렸던 일만이

살아온 목숨 같아서 밤은 더욱 깊고

다시 막차가 오는 날에도 눈가에 습기 드리운 채

영영 두발 실을 수 없겠다

 

 


 

박남준 시인

1957년 전남 영광군 출생. 전주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1984년 <시인>지에 <할매는 꽃신 신고 사랑노래 부르다가> 등을 발표하며 등단. 전주시 예술가상과 거창 평화인권문학상, 천상병 시문학상, 2015. 제14회 아름다운 작가상 수상. 시집 <풀여치의 노래>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적막>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중독자>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