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박이레 시인 / 장미아파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25.

박이레 시인 / 장미아파트

 

 

장미 피었네

담장 위 철망까지 올라

붉은 장미 만발하네

 

101동과 111동은 직선거리 일이 분

담장 못 넘으니 돌아서 십여 분

지난봄, 가시철망 공사가 보강되었네

 

100동 사람들은 110동 사람들을 임대충*이라 하고

옆 단지 사람들은 100동 사람들을 주공 거지*라 한다는데

세상모르고 장미꽃, 자꾸 덤불을 이루고

 

전거지*와 월거지*로

105동에 사는 나

저 덤불, 오래 바라보네

 

덩굴장미 더 피어오르네

아파트 값 오르고 내리는지 모르고

가시철조망 왜 더해졌는지 모르고

철망 위로 오르고 오르네

 

벌레와 거지의 눈길 난무하던 허공 사방으로

장미 덩굴 타오르네

자정 넘은 가로등 아래서도 온통, 붉네

 

혹한기도 길었는데

폭염기가 길고 기네

 

* ‘임대충’은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주공 거지’는 ‘주공아파트 거지’의 준말로 쓰이며, ‘월거지’는 ‘월세 사는 거지’, ‘전거지’는 ‘전세 사는 거지’를 가리킨다고 한다.

 

 


 

 

박이레 시인 / 얼굴

 

 

후배위 자세로 끌어안으려 하자 허리 숙여 일하던 직원은

기겁을 했고 후배 원장은 장난이었다며 웃었다

무슨 짓이냐고 호통을 치고선 대신 사과했다 내가 채용한

비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꼈고 다른 직원들

눈동자가 블라인드 틈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일전엔 다른 여직원에게 그 직원의 상사이자 후배 원장의

친구이기도 한 부장이 회식 모임에서 자리를 옮겨 다니며

술을 권하다 여직원의 허벅질 만진 일로

내게 면박을 당한 일도 있었다 당사자만

따로 부르지 않은 처사에 대해 뒷말이 많았다

 

건물주이기도 한 후배 원장과 그의 친족이기도 한 부장이

노크도 없이 들어와 인사도 군말도 제하고

이달까지 대표 원장실을 비워달라고 하고는 덧붙였다

선배도 환심 사서 따먹고 싶은 거 아니냐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거 줄곧 거슬렸다고

 

선배란 말이 당신이란 말과 동일하게도 쓰이는군

새삼 그런 자각도 하면서 그건 네 열등감이지 인마,

네 오해고, 라거나 아니야 새꺄, 그런 말 않고

웃음기도 없이 비웃는 얼굴에게 알겠노라 했지만

 

후배 원장이 방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에 눈을 뜨니

페이 닥터 자리에 나는 앉아 있고 조금 전 후배는 나와

겯고틀던, 선생들과 선배들에게 적당히 비빌 줄도 알던, 지금은

모 대학 과장 자리에 있는 이란 걸 오후의 햇살이 일깨워 주었다

과로보다 거울 속 내 작은 눈동자가 더 어두웠다

 

 


 

 

박이레 시인 / 안치 터미널

 

 

 사람들은 자꾸 시신을 내다 버렸다

 

 그는 자꾸 사람들을 송장 더미로 불렀다 내가 가르친 학생 아버지고 어엿한 사장이 바빠질수록 그의 눈은 충혈 되었고 형편도 사나워졌다 발을 잘못 들였군, 죽은 자를 어릴 때부터 많이 봐 왔으나 그래서 더 싫어 난 계속 피했고 그는 잠도 설치며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때늦은 수확 철 늙은 농사꾼처럼 사람들이 미쳤어요, 시신 아닌 시신들이 넘쳐나요 한 번은 가 주었다 창고는 한두 곳이 아니었다 앰뷸런스가 아닌 트럭에 실려 오기도 했다 구토를 참으며 안치를 돕는데 주검이 날 붙들었다 어떤 몸은 오리처럼 걷고 어떤 몸은 없는 눈으로 날 봤다 미치지 않으려 힘을 주어선지 쥐가 나 피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죽어가는 자들을 자꾸 내다 버리고 있었다 눈이든 장기든 일말의 쓸모는 재활용했고 회복 불능에 이른 몸들은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아 버렸다 사람들이 미쳤어요, 시신 아닌 시신들이 넘쳐나요 환갑에 가까운 사장은 더 이상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지 않았다 가족과 그가 데려온 사람들과 동분서주할 뿐 일부는 묻고 일부는 임종 후 화장장으로 보내고 일부는 씻기고 깨끗한 옷 입혀 주소지로 데려다 주었으나 다 되돌아왔다 그는 내게도 백혈병을 앓다 버려진 다 죽어가는 아이를 데려가 주길 바랐으나 수락하지 않았다 여자아이는 간신히 내 손을 잡았다 놓았으나 말은 없었다 합법인지 편법인지 불법인지 창고는 날로 번성했으나 국가 보조금도 없었고 밤이 되면 차들이 더 몰려들었다

 

 안치 터미널은 도시에서 멀지 않았다

 

 


 

박이레 시인

경기 양평 출생. 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및 국어국문학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중퇴. 1998년 심산문학상 시 부문, 성대신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 2018년 《시와 세계》 여름호로 시 등단. 전태일문학상 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