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경 시인(보성) / 불면
밤이 빛을 전가하여 새벽은 오고
아가리는 탄력적이고 집요해서 빛만큼 강했다 배가 부르면 뱀처럼 스르르 공간을 빠져나간다 간혹 볼록해진 배가 골목 모서리에 걸려 터지기도 했는데 그럴 땐 야광 파편처럼 사연들이 쏟아져 내렸고
그걸 알아차린 것은 개와 시인이었다
개는 청각으로 그걸 받아 적었다 아주 또렷하게 멍멍멍, 시인은 개 짖는 소리에 리듬을 잃기도 했는데 그래도 필사적으로 기억하려 노력했다
필사적이라는 말은 눈꺼풀의 일
개는 간혹 토끼잠을 자다가도 새벽의 꼬리를 앞발로 지그시 눌러 밤을 지연시켰다 그래도 시인은
잠을 이루지 못했고
뜬눈으로 빛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받아 적지 못한 건 개 때문이라고
기분을 전가한 일이 다반사였다
-계간 『다층』 2022년 봄호
정수경 시인(보성) / 화분 화분에 구멍이 있군요
뿌리는 그 곳에서 왔을까요
열쇠로도 채울 수 없는 문이 존재한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건 화분에 무엇인가를 심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그러니까 몸에도 문이 있군요
입구와 출구가 뒤바뀌는 회전문 같은
아시죠?
때론 몸도 출구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일탈 하나쯤 간직하고 싶어지는 날은 돌과 고양이가 가득 심어진 화분을 들고 나가죠 빈 몸으로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날이죠 문틈으로 파고드는 한 가닥 빛 그러니까 빛이 빠져나가는 저 문의 틈은 화분의 구멍 같은 것일까요 고양이를 심은 화분이라고 불러도 좋겠어요 구멍이 뚫린 화분 내 몸에 있는 빛들은 어느 구멍으로 흘러나가고 있을까요 -제2회 시흥신인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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