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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흔복 시인 / 가을 편지 외 3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9.

이흔복 시인 / 가을 편지

 

 

고죽을 향한 홍랑의 일편심 사랑이 붉어서

가을은 달빛도 한층 높아만 갑니다.

당신은 물로 만든 몸 당신은 벌써

오랫동안 진리보다는 애정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꿈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발 헛디딘 나 사랑에 아팠습니다.

사랑을 사랑했던 자신에게만 들키고 싶은 낯선 시간

저 아래 저 아래로 흘러흘러

나 스스로 어디에서 몽리청춘夢裏靑春을 닫고 있을지요?

 

당신은 내게 꿈이 되어 준 한 사람.

나를 백번 용서하고 천 번 길을 헤매는 동안

꿈을 이어주는, 산울림엔 산울림으로 답하는

당신의 가을 깊은 산에 가고 싶습니다.

 

간밤에는 바람 냉정하고 상강 물소리 좋은

이 고마움 당신 다 가져도 좋습니다.

 

 


 

 

이흔복 시인 / 미황사 법당의 작은 종은 백팔 번은 운다

 

 

땅끝 사자봉

높은 산마루를 출발하여

다섯 시간 남짓 걸으면

달마산 미황사다

 

법당의 작은 종은

백팔 번을 운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저 먼 산을 되돌아오는

깊은 울림,

 

태정은 동백나무 숲에 있고

 

나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몸이 다하면

마음이 밖을 향한다

 

음력 섣달

정월 사이

향기를 읊조리는

동매가 아니고

춘매 어디서든

꽃다운 향내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고古하고 아雅한 꽃으로서

내 백매라면

어찌 으스름 겨울

달 없는 밤을 원망하랴

 

밤마다 꿈속에 들어

잊을 수 없는 이

그립다

 

미황사

해맞이와 해넘이

오래오래 그립다.

 

 


 

 

이흔복 시인 / 내가 나를 사는 날 4

 

 

이 세상 매미 허물 벗듯이 벗어나서

견우성 북두성가로 놓였고

개진개진 젖은 눈에는 극락,

나는 새도 놀라는 마음에는 지옥을 가진다.

삶은 삶 자체로서 목적인 것을

나는 슬픔을 안고 어이없이 간다.

나는 나의 가장 오랜 벗이다.

나를 무진무진 사랑했던 나를 어떡해.

나를 향한 내 사랑이 물망勿忘이 아닐 수 없듯이

달이 떠서 삼오야 갓 지난 때이니 개들은 곁따라 짖는다.

온갖 꽃 다 이울고, 눈 쌓인 산만 드높다.

 

 


 

 

이흔복 시인 / 내 생에 아름다운 봄날

—아내에게

 

 

 나는 네 가슴을 너는 내 가슴을 찬찬 얽동여 숨을 모았다. 그렇게 하여 우리 사랑의 두 탄생이 우리에게 매일을 절절히 접근해온다.

 

 이 세상 모든 이의 가장 고요히 소중한 만큼의 그 사랑으로 우리는 잡사랑 행여 섞일세라 이 사랑 가지고 일생을 어떻다, 살아간다.

 

-시집 『내 생애 아름다운 봄날』에서

 

 


 

이흔복 시인

1963년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 경기대학 국문학과 졸업. 1986년 문학 무크지 《민의》를 통해 〈임진강>외 5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서울에서 다시 사랑을』, 『먼 갈 가는 나그네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나를 두고 내가 떠나간다』, 『내 생애 아름다운 봄날』이 있음.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