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흔복 시인 / 가을 편지
고죽을 향한 홍랑의 일편심 사랑이 붉어서 가을은 달빛도 한층 높아만 갑니다. 당신은 물로 만든 몸 당신은 벌써 오랫동안 진리보다는 애정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꿈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발 헛디딘 나 사랑에 아팠습니다. 사랑을 사랑했던 자신에게만 들키고 싶은 낯선 시간 저 아래 저 아래로 흘러흘러 나 스스로 어디에서 몽리청춘夢裏靑春을 닫고 있을지요?
당신은 내게 꿈이 되어 준 한 사람. 나를 백번 용서하고 천 번 길을 헤매는 동안 꿈을 이어주는, 산울림엔 산울림으로 답하는 당신의 가을 깊은 산에 가고 싶습니다.
간밤에는 바람 냉정하고 상강 물소리 좋은 이 고마움 당신 다 가져도 좋습니다.
이흔복 시인 / 미황사 법당의 작은 종은 백팔 번은 운다
땅끝 사자봉 높은 산마루를 출발하여 다섯 시간 남짓 걸으면 달마산 미황사다
법당의 작은 종은 백팔 번을 운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저 먼 산을 되돌아오는 깊은 울림,
태정은 동백나무 숲에 있고
나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몸이 다하면 마음이 밖을 향한다
음력 섣달 정월 사이 향기를 읊조리는 동매가 아니고 춘매 어디서든 꽃다운 향내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고古하고 아雅한 꽃으로서 내 백매라면 어찌 으스름 겨울 달 없는 밤을 원망하랴
밤마다 꿈속에 들어 잊을 수 없는 이 그립다
미황사 해맞이와 해넘이 오래오래 그립다.
이흔복 시인 / 내가 나를 사는 날 4
이 세상 매미 허물 벗듯이 벗어나서 견우성 북두성가로 놓였고 개진개진 젖은 눈에는 극락, 나는 새도 놀라는 마음에는 지옥을 가진다. 삶은 삶 자체로서 목적인 것을 나는 슬픔을 안고 어이없이 간다. 나는 나의 가장 오랜 벗이다. 나를 무진무진 사랑했던 나를 어떡해. 나를 향한 내 사랑이 물망勿忘이 아닐 수 없듯이 달이 떠서 삼오야 갓 지난 때이니 개들은 곁따라 짖는다. 온갖 꽃 다 이울고, 눈 쌓인 산만 드높다.
이흔복 시인 / 내 생에 아름다운 봄날 —아내에게
나는 네 가슴을 너는 내 가슴을 찬찬 얽동여 숨을 모았다. 그렇게 하여 우리 사랑의 두 탄생이 우리에게 매일을 절절히 접근해온다.
이 세상 모든 이의 가장 고요히 소중한 만큼의 그 사랑으로 우리는 잡사랑 행여 섞일세라 이 사랑 가지고 일생을 어떻다, 살아간다.
-시집 『내 생애 아름다운 봄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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