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잠 시인 / 초록 대문 점집 卍 자 깃발이 꽂힌 초록 대문 집 할머니는 붉은 대추 켜켜이 쌓인 제단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계속 이러고 살겠습니까 팔자를 고치겠습니까 다짜고짜로 묻는 손님 얼굴 찬찬 뜯어본 뒤 엄지로 네 손가락을 맞춰 가며 생년월일난시를 적었다 잔나비 띠에 섣달 초나흘 술시라 그림인지 글씨인지 숙명인지 눈보라인지 모를 기운을 휘몰아 써 내려가다가 할머니는 문득 손을 멈추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참 답답해 순간, 몸의 후미진 귀퉁이가 허물어지며 뜨끈한 것이 왈칵 쏟아졌다 생판 모르는 사람 앞에서 난처하게, 난처하게 다 내려놔, 가벼워져야 살아 석양의 보랏빛 구름 한 세트를 떠올리며 내려놓는다는 말은 구름에 추를 매달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앞이 꽉 막힐 때마다 일이 술술 잘 풀리지? 그게 다 조상 할머니가 돌봐 주는 공덕인 줄 알아 명절날 점방에 앉아 맥없이 눈물 떨구다가 어느 혼이라도 내 편이 있다는 말은 흐뭇이 들려 속이 희여멀건해지는 것이었다 답답할 때 또 오노 백발의 할머니 초록 대문을 열어 저녁 어스름을 저만치 밀어 놓았다 포장 둘러쳐진 신곡시장통을 걸어 나오다 문득 뒤돌아보니 집도 절도 할머니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저녁 하늘에 공터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잠 시인 / 히말라야 소금 청정이란 말은 조만간 국어사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바다가 오염되었으니 생선을 먹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생선만 그런가 내가 나를 더럽힌 날들은 또 얼마인가 인터넷을 뒤져 히말라야 소금을 주문해 놨다 아주 오래전 바다 밑바닥이 솟아올라 산맥이 되고 그때부터 바닷물이 버릴 거 다 버리고 히말라야에 남긴 돌덩이 산을 헐어 국을 끓여 먹으면 병이 나을 수 있을까 손안에서 차돌처럼 반짝인다 흠 없는 몸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돌을 씹어 먹는다 청정하다는 히말라야 산을 입에 물고 녹인다 버릴 거 다 버리고 심심해진 소금 바위 굴러 내려 내 부끄럼들, 사무침들 올올이 녹아내려 창해만리 바닷물로 출렁일 때까지 두 번째 살아보는 것처럼 한 번을 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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