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철 시인 / 오이풀
눈꺼풀 끝에 따뜻한 잠이 해일이 되어 몰려와 자갈 사이 스며드는 모래알처럼 뼛속으로 스며들겠다 아우성친다
내가 일해서 사 입은 속옷 창밖 보름달은 창호지를 희게 두들기며 어두운 하늘 끝에 보람이라는 낯선 말을 뉘어주고 하루 일들도 이불 깃에 속삭이며 나와 더불어 눕는다
이번 대목엔 웃으며 돌아가자
문지방에 손톱글씨로 적힌 말은 내 잠을 지키는 벙어리 등불 어른거리며 고라실 논두렁 끝에 돋아나던 오이풀이 춤추며 온다 때릴수록, 밑둥을 꺾어 손등을 후려칠수록 푸른 멍 뒤흔들며 향기를 뿜어주던 오이풀
강형철 시인 / 내 방엔 쓰레기통이 없다
버릴 것 추려 버리고 지닐 것 정돈하여 차곡차곡 쌓아둘 마음이 없다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정돈을 하면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작자임을 금방 알겠지만 만원버스처럼, 빼곡한 지하철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책들이 그 사람 일생의 사연이고 동전, 성냥갑, 붓펜은 물론 갓 나온 문학잡지, 고장난 전축이 모두가 내 내력임을 어쩌랴
수북하게 쌓인 담배 재떨이는 내 폐부의 실상 답장을 미뤄둔 채 모아둔 연하엽서는 내 사랑의 채무
방에는 전기난로의 코발트선이 뜨겁게 달아올라 영원히 정리되지 않을 내 방과 내 생을 부끄럽게 한다 살이라도 지지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이 정체
강형철 시인 / 그리움은 돌보다 무겁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는 당신이 사랑하는 나조차 미워하며 질투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이 가버린 뒤 고생대 지나 빙하기를 네 번이나 건너왔다는 은행나무에 기대어 견딘다는 말을 찬찬히 읊조립니다. 무엇이 사라진다는 것인가요 당신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내가 지워진 것도 아닌데 심연으로 가라앉는 돌멩이 앞서 깊어가는, 저기 그리움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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