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녀 시인 / 양들의 사회학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울타리를 칩시다 우리 정원이 다 망가졌어요 창문처럼 입들이 열렸다 닫혔다 교회 십자가 하나 세워도 좋을 법한 초원 위에서 양들이 풀을 뜯어 먹는다 눈과 눈 사이가 넓구나 얼굴 옆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이 귀처럼 달려 양들은 눈이 어둡다 큰 눈은 잘 들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습니까? 전 그냥 결정되면 알려주세요 그대로 따라갈게요 양 한 마리가 갑자기 달려 나간다 그 뒤를 따라 우르르 쫓아가는 것은 양들의 습성 벼랑인 줄 모르고 와르르 떨어져 죽는 줄 모르고 아이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상관없다는 표정 털이 계속 자라니까 신경 쓰여 못 살겠어 일 년에 한 번씩은 온몸의 털을 깎아야죠 그것이 문화인의 자세니까 누가 먼저 할까요?
초원은 고요하다 이마는 순하고 양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김지녀 시인 / 나의 잠은 북쪽에서부터 내려온다
북쪽을 모르면서 북쪽이 그리웠다
나는 감염된 계절이에요 팔과 다리를 오므리고 한 덩어리의 어둠으로 녹아가는 중입니다 크고 검은 고래의 뼈를 생각합니다 아늑한 동굴입니다
얼마나 남았을까요? 나는 벤젠처럼 냄새가 없어요 창문을 열어놓고 자는 버릇을 고칠 수가 없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을 지우면서 휘파람을 불면서 아래로 더 아래로, 추락하는 꿈속에서 찬바람이 불어, 나를 모르는 사람의 눈동자에서
충혈된다는 것은 출구가 없다는 것
빗속에서도 젖지 않고 메말라가는 곳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뻗어가야 하는 동굴일까요?
닫힌 서랍 속에서 북쪽의 태양이 길어지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태어나고
북쪽을 모르면서 북쪽이 그리웠다
나는 조금 더 어두워졌다
* 릴케, 『말테의 수기』
김지녀 시인 / 모딜리아니의 화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액자의 바깥을 볼 수 있겠지
눈동자가 없어도 밤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
웃는 입이 없어 조용해진 세계에서
얼굴과 얼굴과 얼굴의 간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무너질 수 있겠지
붉은 흙더미처럼 나의 얼굴이 긴 목 위에서 빗물에 쓸려 나가네 꼿꼿하게 앉아서 갸우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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