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 시인 / 아름다움에 대하여
내 심장을 꿰뚫을 수도 있었을, 화살 하나가 종잇장 하나를 매달고 장대(將臺) 기둥에 날아와 꽂혔다 적장의 편지였다 역관(譯官)을 불러 읽어보라 했다
수레바퀴만한 달이 성곽을 타고 넘어가는 봄밤이오 오늘도 나는 변복을 하고, 동서남북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 이제 막 저녁을 먹었다오
망루며 포대며 당최 치고 때릴 데가 없더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성에 이미 무릎을 꿇었소
날 밝으면, 성문 앞 팽나무 그늘에서 바둑이나 한 판 둡시다, 우리 내가 지면 조용히 물러가리다
혹여, 내가 그대를 이긴다면 어찌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성을 쌓을 수 있는지, 기술이나 두어 가지 일러주지 않겠소?
윤제림 시인 / 동백꽃
협상은 또 결렬된 모양이다 오늘도 북소리에, 일제히 투신.
동백꽃은 파업이 너무 길다.
윤제림 시인 / 길
꽃 피울려고 온몸에 힘을 쓰는 벚나무들, 작전도로 신작로 길로 살 하나 툭 불거진 양산을 쓰고 손으로 짰지 싶은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곰인형 가방을 멘 계집애 손에 붙들고 아낙 하나가 길을 간다. 멀리 군인트럭 하나 달려오는 걸 보고, 흙먼지 피해 일찍 피어난 개나리꽃 뒤에 가 숨는다. 흠칫 속도를 죽이는 트럭, 슬슬 비켜 가는 짐칸 호로 속에서 병사 하나 목을 빼고 외치듯이 묻는다.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한 손으로 부른 배를 안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아낙이 수줍게 웃는다.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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