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 / 청춘
없었을 거라고 짐작하겠지만 집 앞에서 다섯 시간 삼십 분을 기다린 남자가 제게도 있었답니다
데이트 끝내고 집에 바래다주면 집으로 들어간 척 옷 갈아입고 다른 남자 만나러 간 일이 제게도 있었답니다
죽어 버리겠다고 한 남자도
물론 죽여 버리고 싶은 남자도
믿기지 않겠지만
-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김경미 시인 / 취급이라면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래도록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김경미 시인 / 결심은 베이커리처럼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나를 잘 아는 건 나의 결심들 가령 하루를 스물네 개로 치밀하게 조각내서 먹는 사과가 되겠다든지 밤 껍질 대신 뼈를 혹은 뼈 대신 고개를 깎겠다는 것 사람의 얼굴 양쪽에는 국자가 달렸으니 무엇이든 많이 담아 올리리라 국자가 아니라 손잡이라든가 그렇다면 뭐든 뜨겁게 들어 올리리라 여하튼 입을 벌리고 살지 말자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건 내 결심들 한밤의 기차에 올라 옥수수를 너무 많이 먹어 입안이 감당 안 되는 느낌처럼 무엇보다 창피스러운 건 떠나면 후회할까 봐 후회를 떠나지 못하는 신선한 베이커리 빵집처럼 언제나 당일 아침에 만들어서 당일 밤에 폐기하는 결심들만큼 영원히 나를 잘 모르는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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