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외자 시인 / 숨겨둔 집
꼭 돌아와야 하는 소풍은 아니다 가서 늦어져 이쪽에 불이 켜질 때 아무 생각 말고 그 등불 멍하니 바라보다 그만 잠들어버리는 그런 소풍*
갈 곳이 있다 아무도 모르게 숨겨둔 집 경북 안동시 길안면 산하리 붉은 패랭이꽃이 핀 강변 강둑을 따라 어린 아카시아 관목의 잔가지와 잔 돌을 깔아서 만든 집이 있다 당분간은 도요새와 강바람과 물안개에게 맡겨 둔 집 거기서는 내 키가 보이지 않고 내 마음이 보이지 않고 내 발가락이 보이지 않고 내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고 내 추위와 슬픔마저 보이지 않던 크고 따뜻하고 깊숙한 집 아침마다 그곳으로 간다 작고 초라한 이삿짐 슬픔 한 줌과 햇살 한 홉을 태워 내 집 처마에도 불을 켜고 싶다 어쩌면 거기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지상의 많고 많은 집들에게는, 안녕이라고 말해야 할까
지상의 불빛이 천국보다 더 먼 때가 있다
* 이형기 시인의 「소풍」 부분
천외자 시인 / 새 주소
나는 1938년생, 길안국민학교 1학년 1반 이윤순 해방이 되자 학교에서는 부형들에게 국문해독을 시킨다고 온 동네가 야단법석이다
순아, 순아, 이리 와서 네 어머니가 쓴 받아쓰기 노트 좀 읽어보라 “간토긴산” (원문은 강원도 금강산) “시냇가에 버드나무가 푸르오 내 둔덕이 푸르오” (원문은 실종됨)
받아쓰기 공책에 제 멋대로 쓰는 부형들, 틀린 것은 없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삼십 여년 아다마*가 된 어머니의 육체는 이제야 온갖 것들과 편안하게 내왕하는 잔디가 되어 세세연년 푸름으로 깊어간다
사람들이 죽은 자의 주소를 물으면 나는 어머니의 받아쓰기 공책을 내민다,
간토긴산, 시냇가에 버드나무가 푸르오, 내 둔덕이 푸르오,
그리운 내 딸 순아, 이 어미는 원래 푸른색이 아니었어, 푸른색이 꿈이었던 적도 없어 다만, 내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믿었었지
* 흙
천외자 시인 / 달맞이꽃
지금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호젓한 산 길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 귀 별과 초승달을 바라보는 가늘고 긴 목
내 목숨에, 내 죽음에 무엇이 부족하지 푸른 빛도 붉은 빛도 사양
나는 노랑만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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